|
『 서봉암과 김동리 소설 등신불(等身佛) 』 김동리 소설 등신불(等身佛)은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주인공 나는, 정원사(淨願寺)라는 절에 머물게 되면서, 그곳에서 등신대(等身大)의 결가부좌상(結跏趺坐像)인 금불상을 보고 경악한다. 만적이라는 스님이 자신의 몸을 불태워 부처님께 공양하여 성불하였다. 소신공양(燒身供養)이었다. 금불상은 만적 스님의 타다 굳어진 몸에 그대로 금물을 입힌 불상이다. 만적은 어머니의 학대로 집을 나간 이복형 사신(謝信)을 찾아 다니다 중이 되었는데, 어느 날 공양을 나갔다가 문둥이가 되어 있는 이복형을 만나게 되었다. 착하디착한 형이 문둥이가 된 모습을 본 후 충격을 받아 소신공양을 하게 된 것이다.
만적이 몸을 태우던 날 여러 가지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 일어나 절에서는 타다 남은 그의 몸에 금물을 입혀서 등신불을 만들게 되었다.
김동리는 일제 강점기 다솔사에 거주하면서 광명이라는 야학을 열어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최범술 스님과 김범부 선생이 나누는 소신공양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는 서봉사에 전해오는 전설이라고 하였다. 신라의 왕자 두 사람이 서봉사에 거주하면서 많은 불사를 행하였는데, 그 후 형이 되는 왕자는 삭발을 하고 중국으로 가서 소신공양하여 지장보살이 되었고, 아우 왕자는 서라벌로 가서 훗날 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형의 이름은 김수충, 아우이름은 김승경으로 전한다. 김동리는 이러한 소재를 기본으로 하여 소설 『등신불』을 썼다. 문학적 허구성을 일부 엮어서 작품을 완성하였다.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였다. 이 작품의 줄거리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을 『조선사찰사료朝鮮寺刹史料』· 『삼국사기』나 중국의 『구화산지(九華山志)』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조선사찰사료』는 1911년 조선총독부 내무부 지방국이 한국의 각 지방 사찰 중 사료적 가치가 있는 것들을 모아 정리·간행한 책이다. 사천의 사찰로 다솔사와 구룡사에 대한 기록이 들어있다. 『구룡사 사적 병 부도이안비명서 龜龍寺事績幷浮屠移安碑銘序』 기록이 있다. 신라 눌지왕 때에 두 왕자가 구룡사 극락전에 와서 거주하다가, 서봉사로 가서 불사를 한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비는 신라 시대의 일을 조선 시대에 기록하여 비를 세웠다. 내용 중 ‘중추부中樞府’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기구는 신라시대에는 없었고, 조선시대 행정기구이기에 조선조에 비를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의 오류도 있다. 불교학계에서는 눌지왕시대에는 불교가 서라벌지역에만 거의 한정되게 포교 되었고, 삼국통일 이후 우리나라 전역으로 불교가 번성한 것이라 주장한다. 그래서 5세기 시기의 눌지왕이 아니라 삼국사기 기록에 비추어 볼 때, 8세기 시기의 성덕왕일 경우면 이러한 일들이 가능했으리라 한다. 등신불에 나타난 사건들도 성덕왕 시기의 그것과 얼추 흡사하다.
삼국사기 기록과 중국 구화산지 기록, 조선사찰사료에 기록되어 있는 부분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스님은 김교각(金喬覺. 695- 794)인데, 널리 깨달았다라는 이름이다. 스님의 법명으로 보인다. 김교각 이름은 삼국사기에 발견되지 않는다. 성덕왕의 왕자로 김수충이 있는데, 당나라에 출입을 하였다.
성덕왕 13년(서기 712년) 2월 김수충이 당나라에 갔다.
713년 2월 왕자 중경을 태자로 봉하였다. .
714년 3월 왕자 김수충 어머니인 성정왕후가 폐위되었다.
715년 6월 태자 중경이 사망하였다
715년 9월에 왕자 김수충이 돌아왔다.
718년 순원의 딸을 왕후로 책봉하였다.
722년에 승경을 태자로 삼았다.
신라국 왕자 김교각은 당나라 구화산에 머물렀다. 고행10여년...결과부좌한 채로 794년 99세에 서거하였다. 서거 후 많은 이적이 일어났는데, 이러한 이적은 경전에 기록된 지장보살의 이적과 동일하다하여, 지장보살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으로 알았다. 현재 중국에서 이 스님을 지장보살로 알려져 있다.
九華山志 九華山志 卷二 形勝門 第二
民國 蔣維喬 九華山紀遊 唐 開元末, 新羅國王子金喬覺, 至九華棲止, 苦行十餘年. 至德初, 諸葛節爲之建殿宇, 厥後僧徒日衆. 貞元十一年(794년), 趺坐而逝. 逝後靈異, 與經中所載地藏菩薩瑞相相同, 知爲地藏菩薩降世,...
사천에는 가락국의 기록에 의한, 불교 사료들도 많다. 연구하여야 할 부분과 분야가 널려있다. 학계·종교계·사천의 역사문화 단체·시민들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살펴나가야 한다. 그리고 하나의 시각으로만 보면, 논쟁만 분분할 것이다.
전)경상남도 문화재 전문위원 이은식
※이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무관함 2024년 12월 26일 10시 17분 Copyright (c) 1999 사천신문 Co. All rights reserv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