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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선대원군② 』 안동김씨 家의 일족들이 명색이 종친인 흥선을 대놓고 멸시 하였지만 감병학 김병국 형제는 유난히도 흥선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마도 그들 형제는 정이 많은 성품 탓도 있겠지만 어쩌면 파락호 행세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던 흥선의 본 모습을 보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안동김씨가의 권세가 몰락을 했을때도 이들은 끝까지 보호를 받았고 김병학은 좌의정까지 올났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또 한 가지 삶의 교훈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당시 조선 왕실은 적통 후사가 빈약해 가까운 종친을 양자로 삼아 후사를 잇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심지어는 몇 대를 뛰어 너머 양자로 입적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간파한 이하응은 강화도령 철종이 후사가 없는 틈새를 파고 들어가 당시 왕실의 어른인 조대비를 설득해 기어코 안동김씨가의 견제와 위협을 와해 시키고 12세의 어린 차남 명복(고종)을 우여곡절 끝에 왕좌에 앉히는 일을 해낸다. 이어서 어린 고종을 앞세워 섭정을 하게 되지만 고종의 친정체제가 시작 되면서 며느리 민비와의 갈등이 시작 되었고 권력 다툼에서 밀리며 실각도 하였지만 다시 권력을 되찾으려는 저력도 보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속에서 많은 과오를 범함으로써 오백년 조선 왕조가 끝이 나고 대한제국이 시작되는 역사적 격동기도 맞게 된다.
그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의 평가가 엇갈리도 한다. 위민정치를 내세워 세도가들을 몰아내고 전제왕권을 재확립하는 단호함을 보여 주기도 하였지만 정책에서 많은 실책을 범하기도 하였다. 동학과 천주교를 심하게 탄압 하면서 많은 학살을 자행 하였고 서원을 철폐 하였으며 왕권을 강화 시키기 위해 종친들을 대거 중용 함으로써 많은 민폐를 낳았다. 이 모두가 자신이 가진 권력을 강화하고 지키기 위한 수단 이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대외적으로는 근시안적인 시각과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급변하고 있는 국제 정세에 적극 대응을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빗장을 닫아 거는 구태한 정책을 고수 하였다. 또한 며느리 민비와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자 민비의 제거와 자신의 권력을 되찾기 위해 외국의 군대를 끌어 들여 나라를 열강들의 다툼의 장소로 제공하고 말았으며 결국은 일본에게 국권을 수탈 당하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한 지도자의 잘못된 판단이 국가와 국민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되었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의 그의 처세술은 배울점이 많았다. 그는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참고 인내할 줄 알았고 자신의 본 모습을 끝까지 숨김으로서 정적들의 견제에서 살아 남는 치밀함이 있었다. 그러나 기회가 왔을 때에는 빠르게 낚아채는 표범 같은 민첩함과 버틸 때에는 대호 같은 당당함이 있었다. 그는 작았지만 거인이었다.
동재 김정규 논설위원 2026년 04월 23일 9시 59분 Copyright (c) 1999 사천신문 Co.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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