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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삼천포 팔포(팔장포)③에히메촌(愛媛村)의 형성 과정과 경제·사회적 구조 』

2. 노사 체계 및 차등적 배당 구조
에히메촌 어업 조직은 일본인 간의 철저한 협동 조합 형태(자본 출자자=노동자)를 띠었으나, 조선인 노동자에 대해서는 엄격한 민족적 차별 임금 구조를 적용하였다.
어로장, 선장, 기관장 등 주요 역할을 독점한 일본인(내지인)들은 이익 공유제 및 조합 주주 자격을 기반으로 어획 순이익금의 2분의 1을 성과 배당받았으며, 풍어 시 1인당 최고 280엔을 지급받았다.
반면, 삼천포 인근에서 고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망선과 소선에 승선하여 잡일과 취사를 담당하는 단순 노무직인 하장(下長)으로 격하되어, 연간 약 24엔(월평균 2엔 수준)의 저임금 고정 월급제만을 적용받았다.
3. 부업(농업·양잠) 및 자본의 전환
남성들이 장기 출어를 나가는 동안 여성과 노약자들은 부업에 종사하는 치밀한 이중 경제 구조를 구축하였다.
약 75반(22,500평)의 토지를 직접 경작하거나 약 70정보(논 20정보, 밭 50정보)의 토지를 조선인에게 소작 주어 보리, 잡곡, 채소 및 누에고치(양잠)를 생산하여 연간 3,625엔 이상의 부가 수익을 창출하였다.
1923년 4월 13일 미증유의 태풍 참사로 에히메촌 소속 고등어 선단이 궤멸되고 30여 명의 어민이 조난당하는 타격을 입자, 어업 경영을 점차 포기하고 어획 축적 자본으로 토지를 대거 매입하였다.
1935년 11월 야마모토 모모키치 등은 합명회사 삼천포정미소를 설립하여 수산 자본을 지주 및 곡물 가공 자본으로 완전 변신시켰다.
Ⅳ. 토지 이용과 공간 재편: 지적도 분석을 통한 '단체산'의 실체
1914년 조선총독부 발행 지적도 및 향토 사료 분석 결과, 에히메촌 어민들은 삼천포 연안의 해안과 배후 산지를 철저히 자원화하여 독점했다.
통창산(단체산) 일대는 밭(田) 중심의 경작지와 국유지 1곳, 임야 1곳, 그리고 조선인 묘지 8곳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별 필지 분석 결과, 야마모토 모모키치(동금리 247번지), 야마모토 도삼랑(233번지), 야마모토 구길(224, 238번지), 야마모토 평삼랑(243번지), 범산양칠(214번지), 대삼송길(219번지) 등 대다수 토지가 일본인 개별 명의로 소유되어 있었으며, 동금리 236번지는 애원원해출어단체라는 법인 명의로 등기되어 있었다.
통창(단체산)은 원래 조선인들이 산신제를 지내던 당산(堂山)이자 거목이 있던 곳이었으나, 일제 이주민들은 이 구릉지의 기슭을 깎아 장옥을 짓고 산 중·상부(동금리 255번지 추정)에 와카미야 신사(若宮神社)와 기념비를 건립하여 자치 공간화하였다.
이 산은 1940년대 태평양 전쟁기 군수물자 수송용 철도(김삼선 구상) 부지 조성 및 삼천포항 공유수면 매립을 위한 토취장(土取場)으로 사용되면서 상당 부분 깎여 나가 현재의 형상으로 변개되었다.

김진식 논설위원 사천향토사 연구가

2026년 08월 27일 9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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