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자치행정 경제/정보 사회 문화 농어업 교육 환경 스포츠
 
 
 
  봉화칼럼
사천의 목소리 ‘사천신문’ 애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고대합니다!
봉화칼럼 전체 리스트 보기
 
 
『 일제강점기 삼천포팔포④ 사회·문화적 결속과 지역민과의 민족적 갈등 』

Ⅴ.사회·문화적 결속과 지역민과의 민족적 갈등
1. 일본 본국 문화의 이식과 공동체 결속
에히메촌은 외지 속의 작은 우치도마리였다. 어민들은 고향의 유교적 학문 숭상 풍습, 와카미야 신사 수호, 본원사(포교소) 참배, 추석 사자춤 행사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또한, 평의원 10여 명으로 구성된 민족 자치 의결 기구를 두어 어촌 내부 문제를 자율 결정하였다.
2. 지역민과의 갈등과 민족 대립
일제 보고서는 표면적으로 조선인 부락(동금리·서금리)과의 협력을 강조하였으나, 실제 현지 민중과의 관계는 수탈과 대립의 연속이었다.
1919년 3월 25일 삼천포 장날 만세시위 당시, 만세 시위 대열과 농악대는 팔포 모래사장과 통창 앞을 돌며 에히메촌(단따이집)을 직접 위협·시위하였다.
또한 1920년 9월 25일 자 《매일신보》에 따르면, 삼천포 지역민들이 길거리에서 일본인 아동들에게 위해를 가하자, 일본인 거주민들이 대회를 열고 자위책으로 총기 및 탄약을 구입하여 무장하려 했던 사실이 확인된다.
1924년에는 야마모토 모모키치가 남양면 노룡리 일대 토지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조선인 소작농들과 소작권 분쟁을 일으켜 언론에 보도되는 등 일제 지주 자본에 대한 지역민의 반발이 거셌다.
Ⅵ.결론 및 향토사적 의의
일제 강점기 삼천포 팔포의 에히메촌은, 바다 위에 그려진 하나의 흐름이었다. 어업 보조금이라는 물길을 따라 집단 이주가 이루어지고, 건착망 기술은 고등어의 길목을 선점하였다. 그물은 바다를 가르지 않고, 어장을 묶어두었고, 물고기의 흐름은 곧 자본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잡아 올린 것은 단지 고등어만이 아니었다. 어획으로 축적된 자본은 다시 땅으로 스며들어, 토지를 매입하고 정미소를 세웠다. 바다에서 시작된 지배는 육지로 확장되었고, 마침내 매립과 신사 건립을 통해 공간 자체를 새롭게 짜 맞추었다. 그리하여 팔포는 자연의 해안이 아니라, 식민 권력에 의해 재구성된 경계의 풍경이 되었다.
2024년 12월,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장옥(長屋, ながや), 이른바 단따이집이 철거되면서, 눈에 보이던 형상은 끝내 자취를 감추었다. 오래된 목재와 골목, 서로 맞물린 처마의 연속은 먼지처럼 흩어져, 더 이상 현재의 풍경 속에서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사라진 것은 건물일 뿐이다. 이곳이 품고 있던 시간과 구조, 그리고 그 안에 새겨진 질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에히메촌이 남긴 유산은 근대화의 외피로 환원될 수 없는 것, 그것은 남해안의 바다와 어장이 어떻게 식민지 자본에 의해 재편되고, 삶의 주권이 어떻게 잠식되었는지를 증언하는 살아 있는 기록이다.
따라서 섬천포 팔포의 애원촌은 비워진 자리가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이 읽어야 할 자리이다. 보이지 않게 된 경계와 흐름을 따라, 우리는 그 바다 위에 겹겹이 쌓였던 수탈과 재편의 흔적을 다시 더듬어야 한다.

김진식 논설위원 사천향토사 연구가

2026년 09월 03일 10시 14분

Copyright (c) 1999 사천신문 Co. All rights reserved.

이전 기사 보기 홈으로 다음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