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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굽이굽이 옛길을 따라 사천의 역원(驛院)을 거닐다 』 시간의 이끼가 두껍게 쌓인 옛 지지를 펼치면, 까마득한 조선(朝鮮)의 날에 사천 들녘을 넘나들던 마방의 방울 소리와 길손들의 밭은 숨소리가 아련히 들려오는 듯하다.
한양으로 올라가던 뜻 품은 선비, 지방 관아를 바삐 오가던 관리, 그리고 삶의 무게를 짊어진 장돌뱅이들이 짚신을 매매 조이던 그 길목마다 역(驛)이 있었고, 고단한 하루의 해를 넘기던 원(院)이 있었다.
남쪽 바다 건너 남해에서 배를 타고 오르거나 고성 하이 방면의 고갯길을 넘어온 나그네들은 먼저 남양의 문화역(文化驛)에 여장을 풀었다.
연안의 물길과 육로가 만나 숨을 고르던 문화역을 지나면, 바닷길이 길게 펼쳐진 주문나루(注文津)에 다다랐다.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수로를 건너 하동 방면으로 향하던 길손들은 인근의 원우(院宇)에 들러 여독을 달랬고, 길은 다시 북쪽으로 꺾여 사천의 고읍 들녘으로 흘러갔다.
정동면 고읍리 들녘, 지금은 조용한 동계마을을 지나다 보면 세종 19년(1437년)의 먼 날이 떠오른다.
나라에서 동계(東溪)라는 이름을 내리고 역을 세웠던 그 시절, 말의 고삐를 잡은 역졸들은 관아의 긴급한 서찰을 품에 안고 남해안의 바닷바람을 가르며 달렸을 것이다.
주문나루와 하동 길목을 거쳐 올라온 나그네들이 동계역을 지나 사천읍성 그늘의 두량리 관율역(官栗驛)에 다다르면, 비로소 진주목(晉州牧)으로 들어서는 마지막 고비가 눈앞에 다가왔다.
공무로 지친 길손에게 관율역은 목을 축일 우물 한 바가지와 말에게 먹일 풀 한 짐을 내어주며 진주로 향하는 긴 여정의 숨고르기를 도와주던 정겨운 안식처였다.
길은 다시 서쪽으로 흘러 곤명면 완사로 이어진다. 본래 바닷가 덕신에서 왜구의 칼바람을 피해 육지로 올라온 완사역은 서부 경남과 전라의 경계를 짓는 사통팔달의 활기찬 거점이었다.
관마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던 마래등의 둔덕과 곡식을 채우던 사창 자리는 이제 세월의 지형 변화 속에 흔적조차 아련하지만,
경상감사 유공이 완사루에 앉아 푸른 산과 굽이치는 시냇물을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이던 그 봄날의 꽃향기는 여전히 글귀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어둠이 내리면 산길을 넘어온 나그네를 가장 반기던 것은 길목마다 불을 밝히던 원우(院宇)였다.
용현면 구월리 남쪽 길목을 지키던 마월원(磨月院), 사남면 호박떡거리의 정겨운 보통원(普通院), 그리고 삼도수군통제영으로 향하던 고성 길목 정동면 골짜기에 오롯이 남아 있던 가곡원(柯谷院)에 이르기까지…
병조의 초료(草料) 한 장을 쥔 여행자들은 그곳에서 따스한 밥 한 그릇으로 여독을 풀고 먼동이 트기를 기다렸다.
곤양 봉계원의 옛 터는 정유재란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도 곧은 뜻을 잃지 않고 백의종군의 길을 걷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발자국 소리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계절이 바꾸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공영의 역과 원은 하나둘 그 빛을 잃어갔다.
17세기 후반이 지나자 수많은 원우들은 옛 승람의 기록처럼 "옛적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昔有今無)"는 쓸쓸한 문장으로 남아 잊혀갔고, 그 빈자리를 15리, 30리마다 들어선 주막(店)의 주등(酒燈) 불빛들이 대신 채워갔다.
지금 사천의 옛 역원 터에는 신작로가 뚫리고 현대식 건물들이 들어서 과거의 정취를 직접 눈에 담기는 어렵다.
하지만 남해와 고성 하이에서 시작해 문화역과 주문나루를 건너 동계, 관율을 거쳐 진주로 이어지던 그 옛길 위에서, 우리는 여전히 이 땅을 스쳐 지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숨결을 느낀다.
공무의 엄중함과 여로의 고단함,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만나 따스한 밥상을 나누던 옛길의 온기는 사천의 산천에 여전히 영원한 서정으로 흐르고 있다.
“소중한 지역문화의 현장에 있겠습니다.”
김진식 논설위원 사천향토사 연구가 2026년 10월 29일 9시 41분 Copyright (c) 1999 사천신문 Co.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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