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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의 역사와 유적지를 찾아서(22) 남양의 역사(南陽의 歷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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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한 12국 가운데 고자미국(현: 고성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속했다. 이때 사천의 서부지역은 현, 사천 곤명지역인 군미국에 사천 및 동부지역은 포상팔국 중의 하나인 사물국으로 추정한다.
가야시대 때는 포상팔국 의 멸망으로 사천, 진주지역은 고령가야에 흡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가야가 신라 지증뢍(500-514)때 고성지역이 신라에 병합되었으나 이 지역은 신라에 직접 합병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나, 그 이유는 북부지역이 진주가 백제의 거열성이기 때문에 국경지역으로서 행정의 공백이 상당히 오랜기간 있었다고 본다.
삼국시대 때는 백제 근초고왕(346~371)대에 경남의 서북부 지역은 거열성이었으나 이 지역은 사물국에 그대로 속해 있었다.
신라 법흥왕(514~532)때 고자군을 두었고 또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지방 명칭을 고치면서 고자군을 고성군으로 소재지는 강주(현, 진주)에 예속 시키고 고성군하에 3개의 현을 두었다.
현령은 문화랑현(현, 미상), 사수현(사천), 일선현(후, 경덕왕 때 개칭 현, 진양군 일부)등, 3현이 있었다.
사물국에서 사수현으로 격하된 현의 치소는 용현면 석계리에 있었다고하나 조사가 필요하다고 본다.
고려시대 때 남면(南面) 탄생했다. 고려 현종의 아버지 안종이 유배를 와서 사수현에서 여성을 마친 곳이라 하여 현종 6년(1015) 6월에 사수현을 사주로 하고 현감에서 목사로 승격했다.
이때 사주에는 목사가 있었다. 그러나 진양지에는“진주목 남면에 말문리(末文里)와 각산리(角山里)로 정식 행정단위의 명칭이 기록되었다. 말문리의 11방과 각산리의 3방이다.
여기서부터 남양의 기록이 탄생한다. 말문리 11방은 “적례(현, 정니와 미룡), 무임포(현, 대포와 주문 일대), 골동(현, 벽동과 큰골사이), 송포(현, 송천. 사촌. 신송전역), 용두(현, 용두), 이현(현, 배오개), 수내(현, 송포천. 임내. 구미 중간 지점), 검안(현, 검바우), 죽사(현, 죽전), 역촌(현, 문화), 모자랑포(현, 송포의 선전마을(서진몰)부터 서쪽과 정궁텅 일대지역)”이다.
각산리 3방은 “실안(현, 실안일대), 대방(현, 대방과 동동까지의 산 및 전부), 동림(현, 동림에서 선구동 산 및과 벌리 상부지역, 동금동 상부”지역이다.
추정컨대, 현재의 삼천포 중심부 일대(선구동, 동금동 일대의 시가지)는 해변이었기 때문에 그 시기 통창을 관리하는 관사와 관리 및 주거용 등, 작은 부락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외 지역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기록은 전혀 찾을 길이 없다.(문헌:말문리는 주의 남쪽 60리에 있다. 동쪽은 고성의 경계요(이현), 남쪽은 삼천진(사천의 경계)이며, 서쪽은 해포요, 북쪽은 사천의 경계다. 동서가 15리요, 남북이 15리며, 속방이 11이다.
이조시대 때는 남양은 고성에 있다가 사천으로 왔다. 참 오고가고 했네. 조선 태종 13년(1413) 사천현으로 개칭 되면서 세종실록지리지에 병마사 겸 판현사를 고쳐 병마첨절제사라고 하였다. 사주에서 현으로 낮추어진 직위의 관직이 배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단종(1453-1453)때 경상도 관철사 황수신의 장계에서 남면이 진주 남면이 아니고 사천현 남면이라 밝혀지고, 이 때 현 삼천포의 전신인 삼천리가 나타나게 되어 짐으로 사천과 삼천포의 행정관계가 이때에 증명되어 진다.
그 뒤 광무 원년(1897)에 행정구역 명칭변경이 시작되어 말단 조직 기구의 방이 면, 리등으로 개칭되고, 1906년 9월24일 지방구역정리령에 의해 재정비 통폐합을 할 때 남양면은 고성군에 편입되었다가 1910년 9월에 면제가 시행 되면서 고성군에 있던 남양면(진양군의 문선면과 함께)은 다시 사천군으로 돌아오게 되어 남양면은 파란 많은 남양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문헌:남양 역사와 문화 이야기, 진양지
본지주필·사천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김을성 2020년 09월 03일 10시 27분 / 문화 Copyright (c) 1999 사천신문 Co.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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