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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의 옛지명 삼천포(三千浦) 통창(統倉) 』

  사천현읍지(1832년) 창고조에 “사창(司倉)은 성 안에 있고 제민창은 현의 남쪽 10리, 향창(餉倉)은 현의 남쪽 20리, 외창(外倉)은 현의 남쪽 4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중 외창이 통영구관(統營句管: 통제영 관할)을 줄여서 통창(統倉)이라 하였다. 아래 지방지도에는 외창(外倉:주민들로부터 거둬들인 세곡을 저장해 둔 곳)이 있는 남쪽 끝 팔장포(八場浦)에는 서금시(西錦市)라는 장시(場市: 5일장)도 형성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간행된 사천현 읍사례(邑事例) 환정조(還政條)에 원회미(元會米)를 비롯한 우병영미(右兵營米), 좌수영미(左水營米), 통영미(統營米) 그리고 감영의 순영미(巡營米) 등 다양한 종류의 환곡이 있는데, 이 중에 통영미가 위 통창에 저장되어 있었다. 통영구관에는 남해안에 육읍창곡(六邑倉穀)이 있어 통영미는 육읍창곡의 하나이다.
따라서 통영미는 수군통제사가 있는 군대의 군영미로서 쌀 4,747섬 13말, 콩 38섬 4말, 벼 145섬 7말, 피보리 1,064섬 등 도합 5,995섬 9말을 저장한다고 하였다.
아래 차첩(差帖)은 사천(泗川) 팔장포(八場浦)의 수세도감관(收稅都監官) 즉, 조선 후기 궁방전에서 백성에게 조세(租稅)를 징수(徵收)하기 위해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일을 감독하던 아전의 우두머리 관원에게 내리던 임명장이었다.
통창 근처 현재 박수골목은 크게 길이 났으나 그때 이 골목에는 창에 접근을 금하는 뜻에서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대장군(地下大將軍)의 장승이 서있어 박수골목이라는 이름이 있는 것이다. 이 조창은 근 4백 년 전 삼천진(三千鎭)의 군항이 팔포 앞 큰 바다에서 노출되어 보안상 불리하다 하여 한내를 메우고 물줄기를 서금 노산서편으로 돌려내게 되자 우병영창(右兵營倉)을 서동(西洞)제중의원 앞 갯가에 짓고 하역은 선창(지금의 삼천포초등학교)에서 행하여졌다.
이들 창고는 광여도(廣輿圖)를 보면 영조(英祖) 때 설치되었다.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창(倉)의 일부가 남아 있었고, 동학 농민운동 때에는 동학군을 잡아서 구치하는데 이용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이러한 유서 깊은 역사의 자리는 후일 “해운 삼천포”의 효시가 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여지도(輿地圖)의 정확한 제작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지도에 표기된 내용으로 보아 정조(正祖) 때인 1789년에서 1795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어 아래 지도의 시대를 보면 삼천포 조창(漕倉)은 우병영창(右兵營倉), 통영창(統營倉), 순영창(巡營倉)에서 병창(兵倉), 통창(統倉), 순창(巡倉)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화부장 김진식

2020년 09월 17일 11시 06분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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