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자치행정 경제/정보 사회 문화 농어업 교육 환경 스포츠
 
 
 
  봉화칼럼
사천의 목소리 ‘사천신문’ 애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고대합니다!
봉화칼럼 전체 리스트 보기
 
 
『 임진왜란·사천 역사의 현장 모자랑포(茅茨廊浦) 』

  모자랑포(茅茨廊浦)(毛自郞浦. 毛思郞浦) 현재의 위치
“임진왜란 당시 사천해전에서 처녀 출전한 두 척의 거북선을 최초로 출격시켜 승리한 사천 선창 7km 이내에 있는 모자랑포에 정박했다.
이곳 모자랑포 부근 해상에서 거북선 2척과 통합함대 26척이 당시 사천 해전 때, 철환을 맞은 이순신 장군과 군관들을 치료와 휴식을 취하고 이곳으로 이동하여 진을 치고 하룻밤을 지낸 곳이다.
모자랑개는 70여년 그 이전에는 사천시 노룡동(미룡. 충무마을)에서 많이 사용한 말이다. 당시 사용하던 모자랑개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미룡 마을 남서쪽과 충무마을 서쪽 바다를 통칭한다.
이곳은 수심이 낮고 바닷물이 빠지면 해수욕장과 같이 넓은 모래밭이 나타나는 곳이다. 500년 전에는 난곡산(모자랑개 위치에 있는 산)과 모자랑개는 해안선으로 붙어 있었을 것이며, 그곳에는 일 년 내내 마르지 않는 노천 우물이 있었다. 현재는 전부 매립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사천 선창 전투를 마치고, 사량(蛇梁), 당포 즉, 왜적이 있는 동쪽으로 이동하기 전에 밤을 샐 곳으로 이곳 모자랑포를 택한 이유는 지휘관으로서 군사들과 거북선 포함 군선의 안전을 제일 먼저 생각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곳 모자랑포는 사천선창과는 일정거리에 있고, 바다가 내륙으로 오목하게 들어와 있는 만(灣)의 형태라 거북선 포함 군함을 은폐, 정박하기 용이하여 병사들의 식사, 휴식, 치료 등으로 적합한 장소라고 여겨진다.
서일삼(87. 미룡마을. 전 사천시의원)옹(翁)께서는 “이순신 장군의 함대가 밤을 보낸 모자랑포가 구전되어 내려오는 모자랑개와 동일 장소”라고 말한다.
성웅 이순신 장군의 모충공원에 있는 공덕비에도 있다. 이 비문의 일부에 “여기는 사천 땅 달래 끝 거북등이요, 보이는 물목은 바로 모자랑개니 임진왜란 때 백전백승한 성웅 이순신 어른께서 두 번째 일어섰던 사천 해전의 싸움터다. .... 오늘도 어제 같이 물결치는 바다 북편은 적선을 함몰시키던 사천 선창이요. 멀리 서쪽으로 점점한 구름 밑은 신망국활(身亡國活:자신을 죽이고 나라를 살린다)의 최후를 빛내던 노량목 관음포 어구다. ....”
이 공덕비는 해방 후 지역 유지들이 사천 해전 전적지가 보이는 이곳에 이 충무공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곳으로 비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난중일기 초를 집필하신 소오(小悟) 설의식(薛義植 : 1900 ~ 1954. 광복후 동아일보 주필).께서 한글로 글을 짓고, 이화여고 김형순 소녀가 쓰다. 당시에는 보기 드문 전문 한글 비석이다.
이 “비문에 보이는 물목은 모자랑개니”라고 하는 것은 공덕비가 있는 송포동 모충공원에서 보면 약 900m 앞이 전술한 “미룡 남서쪽과 충무마을 아래쪽 바다”를 지칭하는 것으로 지금부터 약 70여년, 그 이전에는 모자랑개를 지역민 모두가 잘 알고 있던 장소였음이 증명된다.
이순신 장군은 茅茨廊浦를 세 번 쓰셨는데, 毛自郞浦 한번, 毛思郞浦를 두 번이나 쓰셨다.
이는 이순신 장군께서 茅茨郞浦 음을 글자로 쓰면서 발생된 오류지만 이를 지금에서 되돌릴 수 없을 것 같다.
따라서 120여 년 전에 없어진 모자랑포지만 진양지가 있는 한 후손들을 위해서라도 모자랑포(茅茨廊浦)의 바른 글자를 찾고, 이명(異名)으로 모자랑포(毛自郞浦), 모사랑포(毛思郞浦) 병용해 야 될 것으로 본다.
위치의 오류도 살펴보자. 임진년(1592년) 5월29일 이순신 장군은 사천 선창에서 승전하고 남쪽으로 이동하여 밤을 샌 곳이 당연히 사천이 아니면 고성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에도 진주는 사천의 북쪽) 그래서 일기책의 장계초고에는 고성지(固城地)라고 쓰고 조정에 보고하는 장계에는 사천지(泗川地)로 기록했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모자랑포가 속한 진주목 남면 말문리가 사천과 고성으로 둘러싸여 있어 정확한 지도 없이는 어디에 속하는지 명확히 구분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 현재까지 여러 학자들이 출간 된 이순신의 난중일기, 임진장초 등 모든 책에는 茅茨廊浦(毛自郞浦)의 현 위치를 경남 사천시 용현면 주문리로 표시하고 있다.
이 오류가 언제 어디서부터 발생 했는지 조사를 해보았다. 여기의 지명들은 일제 강점기인 1935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이순신의 친필 일기와 장계를 활자로 발간한 “난중일기초, 임진장초”가 그 시발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모자랑포 최초 기록인 장계초고의 “...6월초1일 固城地毛思郞浦...”와 두 번째 기록인 장계(狀啓)의 “...移至泗川地 毛自郞浦...”를 모두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활자화 했으나, 고성지 모자랑포에는 일제강점기 때 위치(주소)를 방주(旁註:본문의 옆에 다는 주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번째 기록인 “... 이지사천지 모자랑포...”는 이지사천지 모자랑포 글자 옆에 방주로 “읍 남면 주문리”라고 작은 글자로 당시 일제강점기 때 주소를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거북선이 최초 출전하여 밤을 지낸 모자랑포의 위치를 잘못 정의하게 되는 오류의 원천이다.
1935년 조선사편수회 학자들은 어떤 의미로 주석을 넣었을까? 또한, 고성지 모자랑포는 당시 주소를 방주하지 않고, 사천지 모자랑포에만 당시 주소를 표시 했을까? 지금에 와서 조선사편수회 학자들이 어떤 근거로 정의를 했는지 알 수 가 없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조선사편수회 학자들이 진양지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지 아니면 진양지가 진주지역 기록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 같다고 판단된다.
고성지 모자랑포에 방주하지 않은 것은 사천선창에서 너무 멀어 이순신 장군이 오기(誤記)했다고 판단했을 것 같으며, 임진왜란 당시 사천지역이나 사천선창 주변 해안에는 모자랑포의 지명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진주목 남면 주문리는 바다 쪽으로 돌출된 평지라 이순신 장군께서 많은 군사와 거북선을 포함한 여러 군선을 거느리고 밤을 지낸 지형이라고 판단할 수 없는 곳인데도 모자랑포를 당시 주문리라고 주석을 단 것은 조선총독부에서 성웅 이순신 장군을 폄하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사천 시사(市史)나 용현향토사의 기록에는 용현 주문리에 모자랑포에 관한 그 어떤 지명이나 마을, 땅 지명에 관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이순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불명확한 자료를 가지고 ‘이곳이다.’ ‘저곳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전남 여수문화원에서 발행한 난중일기(1993년 譯者: 鄭熙鐥)의 66페이지 임진년 8월 24일 기록을 보면 사천 모사랑포 내용 중, 번역한 것은 괄호 안에 사천군 읍남면 주문리라고 역자가 쓴 글로 보아 원본 난중일기에는 ( )가 없는 것으로 보아 역자의 생각대로 쓴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이 전술한 내용들은 茅茨廊浦(毛自郞浦, 毛思郞浦)의 현재 위치가 사천시 노룡동 미룡마을 임을 증명하고 있다.
해방 후에 발간된 난중일기. 임진장초 관련 서적에는 모자랑포와 모사랑포를 “사천군 읍남면 주문리”라고 주석하고 있는 것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오류를 검정 없이 그대로 인용해 온 것으로 앞으로는 바르게 정정 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 마을 서일삼(87. 전 사천시 의회의원. 미룡마을)옹(翁)께서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기록한 모자랑포(모자랑포. 모사랑포)는 현재 사천시 노룡동 미룡 마을의 옛 이름이고 그 앞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최초로 전투에 출전한 곳이 바로 茅茨郞浦 해안”이라고 말 한다.

김을성 기자 kimes4000@naver.com

2020년 09월 17일 11시 08분 / 문화

Copyright (c) 1999 사천신문 Co. All rights reserved.

홈으로 다음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