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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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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의 역사와 유적지를 찾아서(27) 약 250년전 사천은 대나무(竹) 산지였다 』

  영조(英祖 1737-1776) 때 제작된 작자미상의 광여도(廣輿圖)를 보면 사천현(泗川縣)은 지금의 사천시 사천읍, 정동면, 사남면, 용현면, 동 지역 벌용동(와룡동) 부근이 해당되며 읍치(邑治)는 사천읍 정의리, 선인리 일대에 있었다. 사천 지역은 높은 산들이 바닷가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큰 하천이 발달해 있지 않다. 지도에도 동쪽의 높은 산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이 서쪽 바다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고을의 진산(鎭山·나라가 지정한 고을을 수호하는 산)은 동쪽에 있는 두음대(벌)산(豆音代山 : 두음산(豆音山) 혹은 두벌산(豆伐山))이다. 읍치 위쪽으로는 조선 명종 때 벼슬이 부제학에 오른 후 고향에 내려와 퇴계 이황(1501-1570)의 문하에 출입한 구암(龜岩) 이정(李楨)(1512-1571)의 서재(書齋)였다는 대관대(大觀臺)가 보이고 있다. 그 왼쪽에는 이정과 이황을 배향하여 1676년(숙종 2)에 사액(賜額)받은 구계서원(龜溪書院)이 그려져 있다.
읍치 아래쪽으로는 사천의 토산물인 대나무가 생산되었던 진주시 금곡면 귀룡산 줄기의 정동면 풍정리, 대곡리 일대로 추정되는 곳에는 대나무밭 표기인 옥산전죽전(玉山箭竹田)이 표시되어 있으며 下南面인 지도 가장 아래쪽에도 각산죽전(角山竹田)이 보이고 있다. 나라에서 쓸 재목(材木)을 키우기 위해 벌목을 금한 신복산봉산(申卜山封山)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잘 자라는 대나무의 종류는 왕대(고죽 苦竹), 솜대(담죽 淡竹), 맹종죽(孟宗竹) 등 3종인데 왕대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대나무의 성질은 단단하고 가벼우며 물기에 견디는 힘이 강하다. 대나무는 옛날부터 청빈한 선비들의 기개를 상징하여, 선비들이 스스로 지켜야할 고결한 정신에 빗대어질 만큼 사랑받았다.
세계적으로 활을 잘 쏘았다고 알려진 한국은 고대부터 활을 주된 무기로 삼았다. 주로 전쟁에 사용할 화살, 어살(漁-: 물고기를 잡는 장치), 도박(賭博) 기구(器具) 등에 탄성이 있는 대나무가 주로 쓰였다. 지금까지 전승되어 오는 전통공예 가운데 죽공예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분야는 낙죽(烙竹)·궁시(弓矢)·채상(彩箱)·소목(小木)·장도(粧刀)·전통(箋筒)·죽립(竹笠)·갓일 등이 있다.
대나무로 만들 수 있는 수공예품이 많다. 방석·바구니·소쿠리와 같은 생활기물 외에도 필통·지통·죽장농·죽장함(竹張函)·죽장연상(竹張硯床)·대빗·죽상자·죽부인·죽사립(竹絲笠)·죽장(竹杖)·죽장고(竹杖鼓)·죽척(竹尺)·죽통(竹筒) 등 플라스틱(plastic) 제품이 없던 시대에 대나무는 일상생활에 긴요한 생필품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대나무는 곧 생필품이었던 만큼 장날에 나가서 곧바로 현금과 바꿀 수 있는 고부가 가치 자원이었다.
사천시 곤양면 상정마을길 비봉내마을의 3만여㎡의 대나무 숲은 맹종죽(孟宗竹)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1965년 비봉내 마을 강태욱 촌장의 부친인 강춘성씨가 거제도에서 맹종죽 종자를 가져와 조성하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대숲을 이루게 된 계기라고 한다. 이곳은 농어촌 체험마을로 지정이 되어 울창한 대밭을 가로지르는 산림욕장과 대나무를 이용한 전통놀이와 공예체험도 할 수 있다.
참고 문헌 : 규장각/이기봉

문화부장 김진식
kimarami2005@naver.com

2020년 10월 22일 10시 54분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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