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사천의 역사와 유적지를 찾아서(29) 각산산성(角山山城)과 구라량영(仇羅粱營) 』
 |
각산은 최고봉에 봉화대(烽火臺)를 머리에 이고 그 맥이 서남으로 내리면서 대방산과 대방골을 형성하고 있다. 정상에는 사천바다케이블카 전망대와 횃불과 연기를 이용해 소식을 전하는 옛 통신수단인 봉화대가 옛 모습을 복원되어 남아있고, 그 380m 아래 등성이에 둘레 약 500m 석축으로 쌓여진 외로운 각산산성이 있다.
「삼국사기」무왕 조를 보면 백제 무왕 6년(서기 605) 봄 2월, 각산성(角山城)을 쌓았다. 가을 8월, 신라가 동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六年 春二月 築角山城 秋八月 新羅侵東鄙]
백제는 전성기에 영토를 이 지방까지 확장한 적이 있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는 "진주목본백제거열성(晋州牧本百濟居列城)" 즉, "진주는 본래 백제의 거열성이었다."하는 대목을 보면 진주가 백제의 영토였다는 사실이 명백히 나온다.
가야제국이 흩어져 살다가 가락국이 신라에 의하여 병합될 무렵에 진주지방의 고령가야는 백제가 공취하여 거열성을 두었다하고 무왕 6년 2월에 각산성을 쌓았다고 하였는데 이 성은 진주의 남쪽 76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오늘의 각산산성이다.
이곳은 역사상 기록으로 각산성(角山城), 각산수(角山戍), 각산향(角山鄕), 진주각산(晋州角山), 각산(角山), 삼천포(三千浦)라 하여 진주목(晋州牧)의 견아상입지(犬牙相入地) 또는 두입지(斗入地)였다. 이러했던 삼천포는 대한제국 광무 10년(1906)에 비로소 사천군으로 이속된 것이다.
그러기에 이곳은 통상 진주로 설명되어 왔다. 한편 고려사(高麗史)에서는 각산수(角山戍)라 하였는데, 이 각산수는 각산성(角山城)이다. 수(戍)는 수변(守邊)이요, 막는다는 알이요, 사(舍)를 말한다. 적군의 동정을 망보려고 성(城)위에 만든 누각을 수루(戍樓)라 하는 것과 같은 뜻이니 곧, 성(城)인 것이다.
진양지(晋陽誌)에 의하면 구라량영(仇羅粱營)의 폐영 이라 하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각산에 구라량영이 있어 수군만호가 관할하고 있었는데 후에 고성군 사량도로 영을 옮겨 갔다고 하고 있다. 고려사 세가(世家)에는 공민왕 9년 4월 20일 왜구가 각산에 침노하였다. 하였고 다시 진양지에는 공민왕 9년 사주(泗州) 각산을 불 질렀다. 하고 있다.
위의 기록에서 고려시대에 대방에는 구라량영이 설치되어 수군만호가 통수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구라량영의 설치 연대는 고려 중엽 원종(1260-1274) 때의 일로 추정된다. 구라량의 구라는 구라도(늑도)를 말하고 량(粱)은 사량(蛇粱), 적량(赤粱), 노량(露粱), 견내량(見乃粱)의 량으로 선박이 기항 또는 정박할 수 있는 소항구를 뜻한다.
이 구라도는 늑도의 본 이름으로 구라는 ‘굴섬’으로 다시 굴레 늑(勒)이 되어 오늘의 늑도(勒島)가 되었으나 고려 때는 엄연히 구라도로 고려사에 나타나 있다. 구라량하면 늑도와 대방 사이의 좁은 해협을 통칭하는 것으로 풀이 되며 이 해협은 진주, 사천, 곤양으로 통하는 요로였기 때문에 바다를 지키는 가장 좋은 지점으로 그때의 고려조에서는 진영을 설치 한 것이다.
본진을 대방에 두고 분진을 늑도에 두면서 이 천혜의 해협을 요새화 한 것이다. 각산산성의 축조가 이때의 일로 추정된다. 대방진인 굴강이 축조되기 이전에도 대방선창에는 선박이 기항하고 정박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대방동의 연혁을 고찰해 보면 진주목 남면 각산리 대방방(大方坊)으로 나타난다. 이곳 바닷가는 사리 때가 되면 굴강 끝머리에서 두루미 주둥이 모양으로 길게 자갈 언덕이 바다로 뻗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자갈언덕 동편에 지금의 굴강자리에 구라량영 소속의 병선이 정박하고 이 요새를 경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군만호라면 상당한 벼슬로서 고려가 이 해협 요새를 얼마나 중요시 하고 있었던 가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마도(馬島), 초양도(草養島)가 이때 병마를 사육 방목하던 섬이라는 것도 이 섬들의 이름으로 보아 추측할 수 있다. 이 구라량영의 기능발휘는 삼별초란(三別抄亂) 때 문신에 반대하는 무신 일파가 반대를 하고 일어서기는 하였으나 형세가 불리하므로 드디어 강화도에서 남하를 결심하고 선박 1천 여척에 자녀들과 재물을 싣고 남쪽 진도(珍島)에 들어가 그들의 본거지로 삼았다.
그리하여 반란군은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면서 남해도와 창선도를 점령하여 진도 본영 다음가는 거점으로 확보하면서 영남의 중심인 진주를 노렸다. 창선도나 늑도 사이는 300m의 이내의 거리이며 또 대방과도 지척의 거리이다. 대방에 본거를 둔 구라량영 휘하의 수군과 서로 맞서게 된다.
특히, 남해도에서 삼별초군의 중견장수들이 진을 치고 있어 진도와 호각의 세를 취하면서 남해안 일대를 소란케 하였고, 구라량영을 위협했다. 이때 고려 조정에서는 김방경(金方慶)장군에 명하여 몽고군과 함께 3군을 거느리고 반란군을 토벌케 하니 진도에서 패하고 제주도로 도주하니 남해, 창선도의 반란군도 제주로 패주한 것도 이때이다.
당시 구라량영 수군이 잘 싸워 진주 점령을 면했고 이에 따라 그때 삼천포가 전화(戰禍)를 모면했던 것이다. 이로서 구라량영의 설치와 각산산성, 봉화대의 축조 연대를 고찰하면 삼별초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반란군이 남해와 창선을 점령하고 난 후 영남의 수부인 진주를 노리니 여기 대비하여 영을 설치하고 성을 축조한 것이라 추정된다.
구라량영이 사량도로 철수해 가고 이 지대가 무방비 상태로 놓이자 이제는 왜구가 침범하여 갖은 만행을 다하니 고려 말 왜란의 역사는 우리 향토사를 비분으로 물들게 한다. 역사 기록에는 보는 바와 같이 공민왕 9년(1360) 4월 20일에 왜구가 대방마을을 습격하여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니 주민들은 화를 피해 각산산성으로 들어가 농성하자 해적의 무리들은 주민들을 추격하여 산성을 포위한다.
갇힌 주민들이 죽을힘을 다하여 돌멩이로서 해적 떼와 항전하였을 것도 상상할 수 있으나 독 안에 든 쥐의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쉽게 점령할 수 없음을 안 왜구들은 화공(火攻)으로 성을 불 지르니 사기(史記)에는 성이 불탔다 한 것이다.
세종실록(세종 20년 10월) 83권에 의하면 의정부 병조가 장계를 올려왔는데 구라량 병선이 사량으로 이전해 온지 오래되었으나 아직도 구라량 만호라고 부르고 있어 불편하니 사량만호라고 개칭해 달라는 공문이 간 것을 보면 대방에서 사량으로 옮긴 후 오랫동안 구라량 만호라고 불러왔던 모양이고 구라(仇羅)를 구량(仇良)이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실록 150권 지리지에는 구라량영은 진주 땅 각산에 있었는데 지금은 고성땅 사량에 있어 병선이 16척이고 수군이 748명이다. 한 것을 보면 대방에 있을 때도 이러한 규모의 병력을 보유한 진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천진이 통영의 미륵산 아래로 옮긴 후 삼천포 근해에는 무방비로 방치된 채 200년을 경과 하다가 구라량영의 본거지였던 이 터전에 새로운 진이 설치되니 대방선진(大芳船鎭)이다. 각산산성과 봉화대가 축조되어 있는 이점도 있어 이곳에 둑을 축조하여 굴강을 만들고 병선을 수용 하였으나 구라량영이나 삼천진의 규모보다 작은 것 이었다.
참고문헌: 와룡산의 정기, 삼천포시지, 서울대 규장각
문화부장 김진식
kimarami2005@naver.com 2020년 11월 12일 11시 15분 / 문화 Copyright (c) 1999 사천신문 Co. All rights reserve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