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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의 역사와 유적지를 찾아서(42) 3.1절 102주년 기념 특집 삼천포 동지역의 삼일� 』

  102년 전 1919년 3월 25일은 사천시 삼천포 동 지역의 3.1운동 거사일이다.
『백 년 전의 그 함성, 선두에서 용진가를 행진곡조로 부르는 모양은 용기백배였다. “저 왜놈들을 모조리 때려죽여라 쫓아내어라. 우리도 독립국민이다.” 하고 사방에서 아우성친다. “자! 동포형제들이여 우리의 독립군은 누구를 때린다거나 폭력을 가하는 행동은 결코 피하고 질서정연하게 저 왜놈의 흉 본부인 경찰서로 가서 대한독립만세로서 대항하자. 만세 만세 대한독립만세”그야말로 와룡산하의 남녀노소, 청년, 군인, 농군, 상인, 은사 각계각층을 총망라한 투쟁이었다.』
삼천포공립보통학교 학생 독립만세시위와 삼천포 삼천리(문선리)장터 독립만세시위는 와룡산하의 삼천리 면민들이었다. 일시에서 일어나는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우렁차게 충무공의 북소리가 스민 거북선이 최초로 출전한 사천해전에서 북받쳐오는 파도소리와 함께 천지를 진동하였다.
진주에서의 만세시위를 주도한 강달성(姜達成)·박진환(朴進煥) 등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돌아온 박종실(朴琮實)은 삼천포공립보통학교 교사인 황병두(黃炳斗) 등과 함께 거사를 논의하였다.
3월 25일을 거사일로 정한 이들은 당일 3대(隊)로 나누어 거사하기로 했는데, 제1대는 황병두와 학생들을 주축으로 노산공원(호연재)에서, 제2대는 청년대를 주축으로 가까운 구름다리(금홍교)에서, 제3대는 일반 면민들을 규합하여 삼천리(문선리) 장터(부두 주차장)에서 봉기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1919년 3월 25일은 삼천포공립보통학교의 제2회 졸업식이 있는 날이면서 삼천포 장날이었다. 졸업식에 참석한 학생들은 일본인 교장의 교육칙어 낭독을 신호로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로 했으나, 흥분된 학생들은 졸업식을 기다릴 새도 없이 간부학생 박상윤(朴相潤)·박종대(朴鐘大) 등을 선두로 교문을 박차고 나가며 함성을 질렀다. 학생들의 뜻밖의 만세시위에 당황한 경찰은 박상윤 등의 학생들을 검거하며 삼엄한 경계망을 펼쳤다.
시위대는 팔포 모래사장, 벅수골목, 서지골목, 새미골목, 통창앞강을 휘돌며 북, 장구, 소고, 징 등의 농악기를 우려 대면서 왜인들의 거주 지역인 에히메촌을 위협하였다. 이에 집안에 있던 면민들도 모두 밖으로 뛰쳐나와 열렬히 호응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제2대의 청년대는 장소를 변경하여 장터로 옮겼다. 삼천리장터에 사람들이 모이자 박종실 등 주도자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장터에 모인 수 백 명의 군중들이 일제히 독립만세를 크게 외치고 용진가를 불렀다.
시위대열이 문선교를 지나고 경찰서에 가까워지자 경찰은 무장경관을 동원하여 선두를 차단하고 시위대를 총칼로 강제 해산하였다. 이날의 시위로 수 십 명의 사람들과 선두의 주동자 대부분은 검거되어 옥고와 태형 90도를 받았으며, 단춘 박종실은 선두에서 지휘하다 체포되어 진주 일제 법원에서 재판을 거부한 일화는 유명하다.
삼천포공립보통학교는 개성에서 이주해 온 손억년(孫億年)과 손종일(孫宗一) 및 강환주(姜煥周) 등이 1770년(영조 46년)에 노산(魯山)에 건립한 호연재(浩然齋)를 1895년에 사립 광명의숙(光明義塾)으로, 1901년에 사립 보흥학교(普興學校)로 개편하였다가, 1905년 4월 장응상(張應相)이 사재를 투자하여 사립 광명의숙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신학문을 교육한 학교이다.
이후 1917년 3월 공립으로 전환하여 삼천포공립보통학교로 설립인가를 받고 개교하였다. 1941년 4월 삼천포일출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1950년 6월 삼천포국민학교로, 1996년 3월 삼천포초등학교로 개칭되었다. 1919년 현재의 선구동 교사로 이전한 뒤, 호연재는 민족혼을 일깨우는 불온사상의 소굴로 지목되면서 강제 철거되었는데, 2008년 10월 팔각지붕의 한식 목조 기와 건물로 복원되었다.
국가 국내독립운동사에 따르면 사천시에서 일으난 3.1운동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① 곤양공립보통학교(현.곤양초등학교)
1919.03.13. 22:00 사천시 곤양면 성내리 18(성내로 25)
사천시 곤양면 송전리 출신의 김진곤은 곤양공립보통학교 기숙사 학생들을 동원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자 하였다. 1919년 3월 13일 밤 10시경 공립보통학교 기숙사로 간 김진곤은 생도 박계술로 부터 필지묵을 빌려서 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태극기를 만든 후 이를 포플러 나무에 매고 박계술 등에게 보여주며 자신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할 것을 권유하였다. 때마침 그 장소에 온 조효제에게 만세를 고창하도록 권유하였고, 조효제가 낮은 목소리로 2회 만세를 부르자 김진곤은 직접 이층으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계단을 내려온 김진곤은 학교를 나와 독립만세를 기록한 태극기를 주재소에 투입하고는 주민을 규합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② 사천공립보통학교(현.사천초등학교)
1919.03.21. 사천장날 사천시·읍 선인리 578(읍내로 59)
졸업식이 시작되기 전 학생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 축구시합을 했는데, 시합에서 승리한 이윤조가 갑자기 가슴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독립만세 함성에 놀라 뛰어나온 일본인 교장은 교직원을 급히 호출하면서 이윤조을 잡으려 하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학생들은 일제히 태극기를 꺼내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때 학교 측의 연락을 받고 출동한 사천헌병대가 이윤조를 검거했는데, 황순주·박기현·김종철 등은 몸을 피해 은신하고 있다가 7일 만에 검거되었다. 사천초등학교에서는 지난 2001년 부터 사천읍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③ 삼천포공립보통학교(노산공원 호연재)
④삼천리 장터
1919.03.25 졸업식 시작 무렵, 삼천포장날 사천시 서금동 101-1
3월 25일을 거사일로 정한 이들은 당일 3대(隊)로 나누어 거사하기로 했는데, 제1대는 황병두와 학생들을 주축으로 노산 호연재에서, 제2대는 청년대를 주축으로 팔포 구름다리 옆에서, 제3대는 일반 면민들을 규합하여 삼천리 장터에서 봉기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⑤ 곤양장터
1919.3월 중순 1919.04.16., 1919.04.19 사천시 곤양면 성내리 70
4월 6일과 19일에는 곤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과 곤양시장에 모인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고창했는데, 즉시 출동한 사천 헌병 분대에서 중심인물들을 검거하면서 진압되었다.
곤양에는 읍성 밖에 북문외시(北門外市)가 있어 5일마다 장이 섰다고 하는데, 북문은 현 곤양초등학교에서 곤양고등학교로 가는 진입 부분에 있었고 북문 밖 하천 옆 모래사장 주위에 음력 5일과 10일에 시장이 섰다. 이곳에서는 장 뿐만 아니라 명절을 기하여 씨름, 윷놀이 등 민속놀이가 개최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하천 옆으로 제방을 쌓으면서 모래사장이 논으로 바뀐 후 시장은 위치를 옮기게 되었다. 증언에 따르면 북문을 중심으로 한 성(城) 안팎의 길가에도 골목시장이라고 하여 시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1919년 당시에는 읍성 내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현재 시장은 남문 밖 옥곡으로 옮겨져 있다.
⑥ 1919.04.05 곤명면 덕천강변 ⑦ 1919.04.14 읍내면 중선리 ⑧ 1919.04.17 곤명면 정곡리
1919년 3월 1일의 독립운동은 그해 1월부터 준비되었다. 조선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독립선언서를 만들어 전국에 비밀리에 전달하고, 서울 탑골공원에서는 수많은 학생, 시민과 고종황제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군중 등 약 20만 명이 참여하였다. 일본경찰과 군대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상인들은 상점을 닫고 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한 상태에서 지방에서는 4월 말까지 주로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운동이 계속되었다.
사천의 독립선언문은 그 당시 해인사 지방 학림의 동학들이 경남 서부지역 일대에 독립선언서 배포를 주도하였으며, 사천 만세시위는 서울 유학자와 인근 진주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한 자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 받아 돌아와 시작되었다.
참고문헌 : 사천시사, 사천항일독립운동사,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 국립중앙박물관

문화부장 김진식
kimarami2005@naver.com

2021년 03월 25일 10시 19분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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