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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의 역사와 유적지를 찾아서(51) 말문리의 치욕과 문선리의 영광의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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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開化期)때 까지 꽃을 피웠던 팔문장(八文章)」
우리나라 한반도 남단의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 고장 사천시 삼천포는 조선시대의 후반기에 이르기까지 삼천포지역은 진주목(晋州牧)의 남면(南面)에 속해 있던 한갓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다.
세종실록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 사천현에 나오는 진주목의 월경지인 말문리(末文里)는 와룡산(臥龍山)은 현 남쪽에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고성(固城)에 이르기 12리, 서쪽으로 진주(晉州)에 이르기 8리, 남쪽으로 진주(晉州) 말문향(末文鄕)에 이르기 17리, 북쪽으로 진주(晉州)에 이르기 16리이다.
호수는 3백 70호, 인구가 1천 8백 17명이며,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23명, 영진군(營鎭軍)이 17명, 선군(船軍)이 2백 28명이다. 땅이 기름지고, 기후는 따뜻하며, (중략) 토산(土産)은 미역·청각(靑角)·우무(牛毛)·세모(細毛)·해삼·생포(生鮑)·홍어(洪魚)·문어·황어(黃魚)·은구어·대구어이다.
월경처(越境處)는 진주(晉州)의 없어진 향(鄕) 말문(末文)의 각산(角山)이 현(縣) 남촌(南村)으로 넘어 들어왔다. 구량도(仇良島)는 수로(水路)로 1리 3백 40보이다. [백성들이 내왕하면서 농사를 짓는다.]고 기록되어있다.
사람들은 순박하고 근면하여 자자손손(子子孫孫) 밭 갈고 씨 뿌리며 한편으로는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으면서 생활을 이어갔으며 봉건시대 유교사회의 전용물이었던 학문 와는 애당초부터 담장을 치고 살아오는 처지에 있었다.
마침내 그 양반사회의 전용물인 학문의 싹을 심는 하나의 특별한 계기가 찾아오게 되었으니 그것은 어느 때 진주에 살던 한 선비집안이 이 고장으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였다. 이 선비의 일가는 지금의 동동 근처에 터를 잡아서 정착하게 되었는데 그 선비는 도무지 학문부재의 열악한 환경을 개탄하던 나머지 사재를 털어 서당 몇 개를 짓게 되었다.
그 선비는 이름난 문사들을 후한 대접으로 초빙하여 비로소 학문을 심어 나가게 되었으니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삼천포에는 그 유명한 팔문장(八文章)이라는 문사(文士)들이 태어났고 그리하여 학문부재의 이 고장에 학문의 꽃이 찬란히 피어나 말문리(末文里)의 치욕을 문선리(文善里)의 영광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250여 년 전인 조선 21대 왕 영조 때의 일이다.
팔문장은 시와 문장으로 뛰어난 우리고장 출신의 여덟 분 문장가들을 지칭하는 말인데 이들을 가리켜 일명 팔재동(八才童)이라 불리웠다. 여덟 분의 문장가는 김식엽(金軾燁), 박진희(朴鎭喜), 유의강(劉儀江), 강영모(姜永模), 최양현(崔亮絃), 고제남(高濟南), 설진열(薛鎭烈), 박봉래(朴琫來)이다.
이들 문장가들이 남긴 유산으로 쌍양사(雙陽社)시집으로 비롯하여 노봉시집(魯峰詩集), 동정율집(東廷律集), 운고시집(雲皐詩集), 남승사시집(南昇社詩集), 기영시집(耆英詩集), 춘파유고집(春坡遺稿集) 등 많은 문집이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등의 문집을 남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1972년 한국문협 삼천포지부(韓國文協三千浦支部)가 탄생 될 무렵 한동안 공백기를 가졌던 문학동호인들은 이 고장의 문학을 살리기 위해 다시 분연히 일어서는 계기가 생겼다.
말문(末文)이라는 치욕적인 지명(地名)을 씻기 위해 일어났던 팔문장(八文章)들의 의분강개(義憤慷慨)한 뜻을 되살리고자 진주 출신인 시인 하연승(河然承)이 삼천포시청으로 직장을 옮겨와서 문학의 불씨를 되살리고자 노력한 끝에 박재삼(朴在森), 방인영(方仁永)과 최송량(崔松良), 김홍태(金洪泰), 조정만(趙正萬), 정시운(鄭時雲), 박건(朴健), 등이 주동이 되어 한국문인협회 삼천포지부 창립의 깃발을 높이 들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2년 10월 인근 진주의 시인 이경순(李敬純), 박재두(朴在斗)등의 협조로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의 인준을 받게 되어 그 해 12월에 창립총회를 갖고 정식으로 삼천포지부가 탄생하게 되었다.
※ 개화기(開化期): 1876년의 강화도 조약 이후부터, 우리나라가 서양 문물의 영향을 받아 종래의 봉건적인 사회 질서를 타파하고 근대적 사회로 개혁되어 가던 시기.
※ 시위군(侍衛軍) : 진주진관 우부를 지키는 군인, 영진군(營鎭軍) : 지방의 영·진을 지키는 군인, 선군(船軍) : 기선군(騎船軍)이라고도 하며 수군으로 해안 방어를 담당했던 수군으로 조운을 담당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 조선왕조실록, 서울대 규장각, 사천시사
문화부장 김진식
kimarami2005@naver.com 2021년 05월 27일 9시 31분 / 문화 Copyright (c) 1999 사천신문 Co.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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