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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의 역사와 유적지를 찾아서(52) 세종대왕 태봉의 원상복원과 안태의식 재현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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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침탈 항쟁기에 파괴되고 왜곡된 세종대왕의 태봉을 원래 자리에 이전 복원하여 민족정기를 되살려야 한다. 세태(洗胎:예전에, 궁중에서 왕자나 공주가 태어났을 때 길일을 택하여 그 태를 깨끗이 씻는 의식을 이르는 말)나 안태(安胎)의식을 재현하여 생명존중의 태실문화를 계승하여 문화융성 발전에 기여하고, 낙태방지 등 사회적 윤리적 정신문화적 대안으로 삼아야한다.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큰 태봉산에 세종대왕 태실지에서 쫓겨난 석물들이 태봉 중턱과 산 아래에 보관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사람이 태어나면 몸에서 태를 잘라내는데 이태를 내버리지 않고 항아리 등을 이용해 땅에 정성스럽게 묻어 두는 풍습이 있었다.
태를 묻어 둔 곳을 태실지, 태실이 묻어져 있는 봉우리를 태봉이라고 한다. 특히 왕의 태실은 즉위하는 그 해에 만들어졌는데, 왕의 치세는 태실에서 시작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왕의 태를 묻을 장소를 찾을 때, 태실도감을 설치해 전국의 길지를 찾았으며, 여러 군데 길지 중에 왕이 직접 선택했다.
심지어 왕이나 왕자 등 왕실자손들의 태를 묻는 곳에 민묘가 있을 경우 왕이 직접 그 민묘를 즉시 이장하라는 어명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최고 권력자였던 왕이 자신이나 자손들의 태를 중시했음을 입증하는 사례다. 그래서 왕의 태실지는 길지 중에 길지. 명당 중에 명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산27번지 위치한 세종대왕 태실지를 찾아 소곡산으로 향했다. 왕의 태실이 있는 곳인지 세종대왕 태실지로 가는 길목마다 주변산은 물론 들판에는 화려하게 치장된 묘소와 비석들이 유달리 많았다. 이는 세종대왕 태실지는 물론 길지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세종대왕(1397~1450, 재위1418~1450)은 조선 제4대 국왕이다.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 사이의 셋째 아들로, 휘는 도, 자는 원정이다. 1413년 5월, 16세 때 충녕대군에 봉해졌다가 1418년 6월, 22세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1418년 음력8월10일 태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왕에 즉위 했다.
세종대왕의 태실지는 즉위년에 원태실지에서 현 위치인 사천시 곤명면 태봉(소곡산)으로 옮겨 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세종실록에는 태실증고사 정이오가 진양으로부터 태실산도를 바치니, 그 산은 진주의 속 곤명에 있는 것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또 태실에 돌난간을 설치하면서 땅을 파서 지맥을 손상시켰으니, 지금 진주의 태실에는 돌난간을 설치하지 말고, 다만 나무를 사용하여 난간을 만들었다가 썩거든 이를 고쳐 다시 만들 것이다. 이를 일정한 법식으로 삼을 것이다고 기록돼있다.
이 기록에서 세종 원태실지는 돌난간 때문에 지맥이 손상돼 있었으며, 곤명으로 옮겨졌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원태실지에 대한 기록은 없어 어느 곳에서 옮겨왔는지는 알 수 없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역대왕조, 역대 왕 중에서 가장 업적을 많이 남긴 최고의 성군이다. 그럼에도 세종대왕 태실지는 파손, 훼손은 물론, 강제로 이전되고 빼앗기는 등 수난의 연속이었다.
지금도 태가 묻혔던 명당자리는 후손들에게 빼앗기고, 석물마저도 원래의 자리에서 쫓겨난 채, 그 존재감마저 알리지 못하고 있다.
사천의 세종대왕 태실지의 안내판이라도 없었다면 과연 이곳이 세종대왕의 태가 묻어져 있던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황량했다.
세종대왕 태실은 파손 등으로 수차례에 걸친 개·보수에도 자리만큼은 차지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후손들의 몰상식으로 쫓겨나 있어 모두가 반성해야 할 일이다.
세종대왕 태실지였던 태봉정상에는 지금 민묘가 버젓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 있던 태실비와 태항아리를 안장하는 중동석, 상개연엽석, 돌난간, 지대석, 주춧돌, 팔각대 등 당시의 조형유물은 봉우리에서 약 50m 떨어진 산 왼쪽 동편기슭 턱에 한군데 모아져 있다.
경남 지방기념물 제30호로 지정돼 보호 되고 있으나, 국가 차원에서 원형 복원이 시급한 시점이다. 특히 세종대왕 태실은 일본에 의한 수난이 심했다.
즉위 원년에 이봉된 태실은 174년이 지난 임진왜란 때 왜구에 의해 파손되는 첫 수모를 겪는다. 선조 34년(1601년)의 세종대왕 태실 석난간 수개의궤에 따르면 태실외면의 석난간은 모두 훼손되었고, 석주는 8개 중 2개가 깨어지고, 부석과 연엽석, 중동석은 흩어져 있고, 개석은 뽑혀졌다고 기록돼 있다. 즉 훼손된 부분이 석난간이 아니라 모든 부분이 파손된 것이다.
지난 4월17일 동방시원문명탐사단(단장 김구룡) 단원 6명이 세종대왕 탄생 624돌에 원정 큰 임금(세종대왕)의 태를 묻은 태실지를 원상회복하는 것이 문화세계와 문화융성으로 가는 첫걸음임을 명심하고 안태 의식을 재현하고자 실태조사를 마치고 안태의식을 재현 하는 의례를 학계를 중심으로 연구하고 있어 태실지 원상회복과 안태의식이 제현 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경남일보, 세종실록, 사천문화원 2000년 11월
본지주필 김을성 2021년 06월 03일 10시 02분 / 문화 Copyright (c) 1999 사천신문 Co.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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