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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의 역사와 유적지를 찾아서(56) 1914년 초여름 사천 선진항에서 진주로 가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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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6월 23일부터 1914년 7월 10일까지 每日申報에 연재된 소설 주유삼남(周遊三南)는 일재(一齋) 조중환(趙重桓)선생이 진주의 거리풍속 등 기생에 대한 이야기와 경상북도 대구부 지역의 생활문화를 많이 다루었고, 경상남도를 두루 다니면서 쓴 기행문을 매일신문사에 연재한 소설이다.
周遊三南(8)은 창원, 마산을 거쳐 통영에서 기선(統營丸)을 타고 삼천포와 선진항을 통하여 사천읍에서 진주로 길에 그 당시의 도로사정과 군대에서 제 몫을 다한 노마(老馬)가 처한 환경과 진주 남강에 도착하여 배다리에서 삯을 내고 건너던 모습을 담았다.
일재 조중환은 양주 조씨이며, 1884년 갑신생이다. 아들과 두 손자들은 각각 1908년, 1928년, 1941년생이다. 장남 조창호가 함흥에서 개업한 바 있으며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후신인 신한공사 (新韓公社) 소속의 의사로 족보에서도 '의학박사'라 명기해 두고 있다.
주유삼남(周遊三南)(8),
“진주라는 촉석루, 논개 사당도 그 곳”(1914년 07월 08일 每日申報)
기선(통영환)은 더욱 진행하여 삼천포를 지나고 얼마 아니하여 선진이라 하는 항구에 다다르니 그 때는 18일 오전 6시라 물 그름 하게 흐린 하늘은 바다 바람에 더욱 습기가 사람의 몸을 음습한다. 선진이라 하는 곳은 비록 선척이 출입하는 곳이로되 아직도 충분한 발달은 되지못하여 인가도 희소하고 행인도 많지 아니하나
다만 진주한 곳을 등에 지고 영업하는 곳이라 장산은 해변까지 나와 있고 그 앞으로 산골짜기 마다 3·4호식 촌가가 곳곳이 있어 적막 무미한 일과 해변 촌락이라 기선에서 내려서며 즉시 로마차를 빌려 오십 리의 거리 되는 진주부로 향하여 가는데 그 길은 요사이 치도한 곳이라 땅이 완전히 굳지 못하여 비온 후에 소 발자취와 구루마의 왕래한 자국이며 농군의 발자국이 우먹 우먹 하야
오장이 요동하는 마차가 그 위로 지나여가뫼 바퀴는 걸리어 흙에 박히고 끌고 가는 말은 평성의 힘을 다하여 두 눈이 불끈 솟도록 근력을 다하나 바퀴는 용이하게 흙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공연한 말은 힘만 쓰는 것이 일개 말 못하는 동물이라도 그 신체의 가련함을 측은히 생각 하였도다 그 뿐이 아니라 그 말은 수척함이 극도로 달하야
가히 피골(皮骨)이 상련(相連)이라 하여도 가하겠는데 말을 어거 하는 자는 척직(채찍)을 들고 그러면 아니 간다고 두다리니 기운이 시진한 말은 다만 그곳에서 네 족만 버리 적 거리고 있을 따름이라 자기는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야 마부에게 질문을 하였더라 아무리 즘성이라 하기로 힘드는 일을 시키면서 잘 먹지도 아니하고 저렇듯 수척한 몸을 만들어 놓고 무슨 떳떳한 얼굴이 있어 그와 같이 두다리느냐(말채찍을 휘두르다)
그 말의 대답이 더욱 무도하다. 그 말은 본래에 군대에서 쓰는 말로 년(年)기가 차서 민간에 방매한 것인데 이후 1, 2년 동안만 지니면 그 말은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는 고로 아무리 잘 먹인다 하여도 목숨을 길게 지탱치는 못하고 공연한 돈만 드릴뿐이니 차라리 살아 있을 때에 마음대로 부리여 먹는 것이 이익이라 하는 말을 들었도다
인간과 동물을 물론하고 신세가 저 모양이 되면 가히 단식할 밖에 다른 도리는 없으리라 하는 생각에 자기는 무한한 동정을 그 말의 신상에 대하여 주었으나 그 말은 그와 다른 동정심이 있는 사람이 뒤에서 있는 줄은 아는지 모르는 지 여전히 채찍이 무서워서 굽을 헤비며 전신에 땀을 흘리어 락슈를 지었더라 사천읍을 지나고 삽 십리를 앞으로 나아가서
진주 남강을 바라보며 강두에서 마차를 내리었으니 정오쯤이라 먼저 새롭게 눈에 띄는 것은 척척마다 울~창~한 죽림(竹林)이 늠름한 기운으로 외타의 초목을 압시하는 듯 한 것이오 또는 진주부의 한 경색을 도음는 중요한 물건이라 하겠더라
남강을 왕래하는데 편리하도록 다리(浮橋, 진주 남강 배다리)를 놓고 한번 건너가면 그 삯이 일전이라 로비의 남아지를 떨어 내여 일전을 주고 다리를 건너가 들어가니 전일에 듣던 진주갑영이 실지로 접촉함에 대하여 난 외양으로만은 별로히 감복함에 난 이르지 못하였도다. ※ 원문 해석에 잘못된 부분 있으시면 의견 주시기 바랍니다.
강호광의 진주 근현대사 자료에 따르면 남강 배다리는 민간자본에 의해 완성되었기 때문에 통행료를 부과했고, 통행시간에도 제한이 있었다. 총독부는 배다리를 완성한 사시키에게 6년간 통행료 징수에 관한 권리를 주었던 것이다. 이에 주민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1915년 7월, 경남도청은 지방비 6,243.50전을 투입해 남강 선교를 매입하였다. 1915년 7월 18일부터 남강 선교는 통행료 없이 건너게 되었다.
참고문헌 : 每日申報, 강호광의 진주 근현대사
문화부장 김진식
kimarami2005@naver.com 2021년 07월 08일 9시 59분 / 문화 Copyright (c) 1999 사천신문 Co.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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