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각산 용운사 돈조(頓照)스님이 걸어 온 길 』
 |
한려해상공원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각산 아래 각산 골(사천시 삼천포대교로 385-39) 용운사를 찾았다.
용운사는 동서동과 선구동의 뒷산인 각산으로 오르는 잿골(祭谷:재를 지내는 골짜기) 골짜기에 있는 절로서 옛날에는 시내에서 아주 가깝고 한적한 곳이었다.
이절은 170여 년 전(1850년)에 각산암으로 창건하여 용운사로 바뀌어 지금의 자리에 중생들의 기도처를 이루고자 부처님의 도량이 창건되어 삼천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절이다.
이 절에는 20세기의 고승이며 당대 최고의 율사 스님이신 동곡(東谷) 일타(日陀) 대종사와 일고 화산 스님이 주석하여 탁마(琢摩)하였던 곳이다.
돈조(頓照) 주지 스님은 오후 무렵 밭에서 울력을 하고 있었다. 공부하는 시간 외엔 밭에서 쉼 없이 몸을 움직인다. 이게 스님의 일과 전부이다.
“일을 하면 무엇이든 얻어지지요. 땅을 바라만 보고 있으면 뭐가 나옵니까?” 쌀 한 톨을 심어서 자라난 벼 한 포기에선 백여 개의 쌀알이 거둬진다.
그것과 같이 우리의 나쁜 습은 그대로 두면 쌀알이 늘어나듯 이자가 붙어 자꾸만 나쁜 습이 쌓여간다.
그와 마찬가지로 공부를 하면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쌓여간다는 말씀을 이어 놓는다.
“벼도 하물며 봄에 심어 가을에 추수하는데, 백년을 사는 우리 인간이 하루 공부해서 금방 수확하려는 건 어불성설이지요. 백년기도 하고 일 년 기도해도 왜 이리 안 되느냐고 하지 말란 말씀이다. 평생을 공부하란 말”이다.
스님은 “능엄주 외의 다른 책은 손에 잡아본 적이 없다. 30년 훌쩍 넘도록 능엄주 기도만 했다. 살림을 살면서도 하루에 8시간씩 공부한다. 살아있는 동안은 내내 그럴 것”이라 고 말한다.
스님은 강원을 마치고 해제 결제 없이 3년 동안 통도사 선방에 있었다. 그리고 해인사 선방에서 한철 살고 나와 지리산의 토굴에 들어가 3년간 능엄주 기도만 하고 살았다. 일종식(一種食:불교에서 하루 한 끼만 먹는 수행방식)을 하면서 공부 했다.
번뇌 망상이 끊어진 상태에서는 일종식을 해도 배고픈 줄 몰랐다. 겨울철에 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 데도 추운 줄도 모르고 되레 힘이 났다고 한다.
자연의 에너지가 움직거렸다. 잠을 자면서도 능엄주가 돌아가고 움직이면서도 능엄주가 돌아갔다. 공부하다가 잠시 눈을 돌려보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 날이 새어 있었다. 몸은 이곳에 있어도 마음은 인도에서 부처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은사 스님이신 일타스님께선 죽는 날까지 능엄주만 보라고 하셨다고 전한다.
“은사스님께서 제게 말씀하셨어요. 바보처럼 살 때, 네 인생이 바로 사는 것이라고.”
돈조 스님은 주지로 있으면서도 승용차도 없으며, 가진 것도 없다. 일타 은사 스님께서 운전은 배우지 말라고 하여 운전도 안하고 승용차도 없다.
출타하는 일도 많지 않다.
그저 손에 능엄주 한권 들고 홀홀히 살아있는 의식 속에서 몸을 움직일 뿐이다. 죽는 날 까지 그러할 것이다.
도반 스님들에게도 함께 공부하고자 해도 아무도 나서는 이 없고 둘 있던 제자도 다 가버렸다. 차도 없이 걸어 다니니 생활도 의식도 구식이라며 모두 떠났다.
억지로 잡을 수도 없는 노릇 이었다. 그러나 먼 곳의 수많은 신도들은 사천의 각산 용운사를 찾아들었다.
30여 년 전에 스님이 토굴처럼 살려고 지었다. 유서 깊은 절도 유명한 절도 아닌데 신도들이 찾아든다. “스님이 능엄주 기도한지 30여 년이 넘었으니 찾아오는 사람이 꽤 많이 있단다. 능엄주 기도를 하겠다고 능엄주 책도 신도들에게 많이 나누어 주었다.
찾아오는 사람은 놓치지 않고 가르쳐 주었다. 그러다보니 하루 108번씩 능엄주 기도하는 신도들이 많았다. 억지로 시키는 것은 결국 안 된다.
스님은 양산 통도사 뒤 마을의 외딴집이 속가(출가 전에 살았던 출생지)이다. 그곳에서 태어나 자란 스님은 군에 있을 때, 일타 은사 스님께서 군대를 방문 하였는데 그날 밤에 일타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속가와의 인연에 대해 알게 되었다.
70년대에는 큰 절도 먹고 살기가 어려웠다. 어렵던 시절에 일타 스님께서돈조 스님의 속가에서 밥을 많이 얻어먹었다고 하셨다. 부모님과 오랜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스님은 군 복무를 마치자 속가에도 가지 않고 해인사에서 일주일간을 머물기로 했다.
절에서 쉬면서 이제부터 사회에 나가 무슨 일을 하며 구상을 할 참이었다. 그런데 며칠 쉬는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쉬고 있는데 일타 스님께서 내려오지도 않고 다른 스님에게 스님의 머리를 깎으라고 하셨다. 그런데 머리를 깎기 싫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스님이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머리를 깎고 일타 스님이 살아오신 얘기를 들으며 , 그렇게 스님은 행자 생활을 시작 했다.
해인사 강원을 마치고 선방에서 나와 31년 전 이곳으로 온 것은 은사스님의 뜻이었다. 공부하기에 좋은 터이니 평생 여기서 공부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해서 스님은 토굴을 오가며 이곳에서 끝없이 공부를 했다. 그러다보니 불사도 많이 했다.
차에서 만난 제일 교포 할머니 보살님이 많은 시주를 하기도 하고 통도사에서 기도하며 만난 보살님도 보시를 하고 또 용운사 뒤편의 일천 평이 넘는 땅을 시주하여 불사를 했다.
스님은 군에서 3년간 군 법당에 있었다. 제대하고 나와서 포교를 잘해봐야지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포교가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스님은 포교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불심을 심어주는 것도 좋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본보기가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돈조 스님은 조선시대 억불정책 속에 벽송 지엄(碧松智嚴·1464~1534. 태고 보우 국사의 5대손·함양 지리산 벽송사 창건)선사로부터 가물대는 전등(傳燈)의 불씨를 이어 서산 청허(西山淸虛)대사와 부휴 선수(浮休善修)대사의 양대사의 양대 심지를 밝혀주어 조선의 불교를 중흥시킨 위대한 스님이며, 사천 대포동 심포마을에서 출생한 부용 영관(芙蓉靈觀·1485~1571)대선사의 출생지에서 부처님의 법을 이어오고 있다.
스님은 사천불교 2천년사에 부용 영관 대선사의 이야기를 책으로 출판하였다. 부용 영관 대선사는 승려가 천대 받던 조선시대에 사천에서 종살이 하던 천민의 아들 부용 영관 대선사가 13세(1549년)에 출가하여 벽송 지엄 선사로부터 법을 이어 받았다.
그 후, 서산(청허)과 부휴 선수 제자에게 가물대는 전등의 불씨를 밝혀주어 조선 불교를 중흥시킨 위대한 스님으로 부용 영관 대선사의 정신을 국내외에 알리고 생가 터에 유허비를 세우고 기도처를 불사하기로 하였다.
돈조 스님은 생가 터 복원 불사를 위하여 한평생 부처님의 제자로서 살기로 작정했다.
스님은 “2021년 부용 영관 대선사 선양회 재단을 설립하고 용운사 전 재산을 기증한데 이어 3년 후인 2024년에는 생가 터 복원 불사 금을 기부한다.”고 밝히고 내년부터 제1회 대한민국 육·해·공군 호국영령 합동위령제와 사천시민을 위한 수륙대제를 봉행하여 불자들의 보시금을 재단에 기부하기로 했다.
돈조 스님은 “부용 영관 대선사님의 불교계의 위대한 업적을 전국의 불자들에게 사천이 불교의 성지를 알리고, 부용영관 대선사의 출생지, 임진왜란 사천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처음으로 출전하여 왜적들을 물리치고 어께에 총상을 입어 치료하고 하루 밤을 지낸 모자랑포와 거북등(모충비가 있는 곳)을 관광벨트가 되도록 힘쓰겠다.”고 한다.
부용 영관 대선사 선영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돈조 스님은 세간(世間)을 벗어나 평등한 출세간(出世間)을 향해가는 사문(沙門:출가하여 불문에 들어 도를 닦는 사람)들에게 출가 할때의 그 광경은 오래도록 잊어지지 않는데, 서로대비되는 분이 부처님이시고 부용 스님, 그리고 용각산 용운사 돈조 스님이 아닐까?
불가의 큰 스님으로서의 무소유 정신을 고취할 뿐 아니라 세상의 큰 가르침을 주는 참 스님으로서 존경받을 수 있는 스님이다.
정천권 기자 ckjung8226@naver.com 2021년 08월 12일 10시 08분 / 문화 Copyright (c) 1999 사천신문 Co. All rights reserved.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