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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의 역사와 유적지를 찾아서(65) 삼천포중앙시장, 남일대해수욕장의 탄생 기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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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포중앙시장은 조선총독부 관보 제595호, 조선총독부 경상남도 고시 제 91호에는 삼천포시장(현. 삼천포중앙시장)의 생성일은 1928년 12월 14일이다. 내용을 살펴보면 사천군 삼천포면 삼천포시장의 위치 등 변경 허가는 소화 3년(1928년) 12월 14일 경상남도지사 허가이다. 위치는 사천군 삼천포면 선구리 18번지와 38번지이다. 면적은 7,409평(24,492.562㎡)에 단 유효면적은 5,000평(16,528.9256㎡)이다. 개시일은 음력 1,4,6,9 상당일과 휴업일은 음력 정월 1월이며, 개시시각은 일출과 출몰이 끝나는 시간으로 정하고 기타, 시장의 시설 설비와 관리방법, 판매물품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삼천포시장 선구리로 이전이라는 1929년 01월 03일자 동아일보에는 종래에 사용하던 시장이 협소하여 선구면장의 면 경영으로 선구리 해변에다 수천 평을 매축하고 도 당국에 허가신청을 득한 후 12월 30일부터 시장을 이전하였다고 나와 있다. 1926년 02월 15일 慶南 泗川郡 三千浦面 仙龜里 앞바다 6,963坪을 市場敷地로 만들기 위해 1930年 3月 31日까지를 竣工期間으로 三千浦面에 埋立을 許可하다.(朝鮮總督府官報 1926.02.18.), 1930년 10월 30일 해수면매립준공 慶南 泗川郡 三千浦面 仙龜里 앞 海面 5,412坪餘를 三千浦面이 埋立 竣功하다.(朝鮮總督府官報 1930.11.04.)
삼천포에 시장(市場)이 부족하여 선구리 해변의 구릉지였던 곳의 일부를 매립공사를 진행하였다. 1927년 12월 부산일보에는 진주의 토목회사에서 나와 삼천포시장 부지 매축지 검사를 하였다고 나와 있어 이를 대변해 준다. 한편, 사천시장(泗川市場)은 조선총독부 관보 제1918호, 조선총독부 경상남도 고시 제 70호에 의하면 사천군 사천면 정의동 411번지(1,958평)로 장소를 변경하여 생성일은 1933년 05월 27일이다.
1916년 4월 8일 부산일보에 의하면 삼천포(남일대)해수욕장은 도로개설문제 등을 해결하여 설립이 준비되었으며, 당해 7월 20일 개장하였다. 남일대해수욕장은 1916년 7월 20일 일본인에 의해 최초로 개장한 것으로 보인다. 1934년 개장 시에는 식존 삼천포읍장의 개회사와 해상경기를 하였는데 3,000여명의 관중을 이루어 근래에 없는 큰 모임을 이루었다고 동아일보는 전한다. 그러다가 해마다 해수욕 인구는 매년 증가하고 기존의 해수욕장이 시가지외의 장소에 있어서 관리가 부실하고 교통상의 불편한 점이 많아 지금의 만구수산 인근의 와전발전소 해변으로 이주를 결정하고 일반 이용객의 편리를 제공하기 위해 설비를 완비하였으며, 아동 보건을 위한 바다학교를 개설하였고, 1936년 7월 18일 각산해수욕장이 개장하였다고 매일신보, 부산일보가 각 각 전했다.
삼천포개척자라고 각 신문마다 대서특필 되고 일본인 거주자 중 가장 많은 토지를 소유한 대야육이(大野育二, 오오노 이쿠지)는 1915년 01월 30일 부산일보 대야육이[大野育二]씨 부산 오다 라는 기사가 있어 이때부터 삼천포에 이주하여 해방 때 일본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1925년 11월 10일 부산일보에는 경남의 자동차왕 대야육이[大野育二]씨 조선 교통계의 공로자라고 평가했고, 삼천포항만수축공사와 김천 삼천포간 김삼선(金三線) 철도부설 실현에 활약하였다.
남평(南坪)부락 근방을 왜등 이라고 불러 왔는데 이 왜등은 일본인 농업 이민단이 동척사업(東拓事業)으로 20호가 이주해 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평의 왜등에 일본인들이 살면서 농사를 짓는데 생활풍속이 상스럽고 불미하여 오늘의 봉이동 주민들은 그들이 사용하는 길을 이용하지 않고 새 길을 만들어 통행하였다. 한마디로 일제 강점기 때 이주해 온 일본인들을 천시했던 것이다.
참고 문헌 : 와룡산의 정기, 조선총독부 관보, 부산일보
문화부장 김진식
kimarami2005@naver.com 2021년 10월 07일 9시 59분 / 문화 Copyright (c) 1999 사천신문 Co.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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