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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칼럼
꺼져버린 동 지역 경제 불씨, 공약 사업 향촌동 산단 조성으로 되살려야!
사천시의 지형은 통합 이후 오랜 세월동안 미묘한 지역적 균형과 갈등 속에 숨결을 이어왔다. 특히 동 지역(구 삼천포)주민들에게 시정(市政)의 향방은 단순한 행정 서비스의 만족도를 ...... 봉화칼럼 전체 리스트 보기
 
 
『 사천해전에서 적탄 맞은 이순신 장군 밤새 치료한 “모자랑포”, 작은 팻말 하나만 』

  이순신 장군의 업적중에는 “사천해전”을 빼 놓을 수 없다. 사천앞 바다에서 벌어진 “사천해전”은 이순신 장군이 맨 처음으로 거북선을 이끌고 참전해 왜적을 섬멸한 해전으로 역사상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 해전에서 장군은 왜적의 총탄에 왼쪽 어깨를 맞고 모자랑포(毛自郞浦)에서 밤새워 치료를 하고 이튿날 곧 바로 다시 출전한 기록이 있다.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사천해전”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우수사(이억기)가 오지 않음으로 홀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떠나 곧장 노량(露梁)에 이르니, 경상우수사 원균은 미리 만나기로 약속한 곳에 와서 함께 상의 했다. 왜적이 정박한 곳을 물으니, 왜적들은 지금 사천선창(泗川船倉)에 있다고 한다. 바로 그곳에 가보았더니 왜적들은 이미 뭍으로 올라가서 산봉우리 위에 진을 치고 배를 그 산봉우리 밑에 줄지어 매어 놓았는데, 항전하는 자세가 재빠르고 견고했다.
나는 여러 장수들을 독려해 일제히 달려들며 화살을 비 퍼붓듯이 쏘고 각종 총통을 바람과 우뢰같이 어지러히 쏘아대니 적들이 무서워서 물러났다. 화살에 맞은 자가 몇백인지 알 수 없고 왜적의 머리도 많이 베었다.
군관 나대용(羅大用)이 탄환에 맞았고 나도 왼쪽어깨에 탄환을 맞았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활꾼과 격군중에서 탄환을 맞은 사람이 또한 많았다. 적선 13척을 불 태우고 물러 나왔다.』
“이순신 바다에서 길을 찾다”라는 역사문화 기행서를 저술한 전북 원광대 나종우 교수(이순신 프로젝트 역사 고증위원회 위원장)는 “사천해전”은 거북선의 첫등장이라는 의미와 함께 1차 출전때와는 달리 육박전에 가깝게 서로가 힘을 겨룬 해전이었다. “결과는 일본 수군의 완패다”라고 적고 사천해전의 의미를 크게 부각시켰다.
이 해전에서 부상 당한 충무공은 “적들에게 내가 부상당한 것을 모르게 하라”고 했다. 그날이 임진년(1592년) 5월 29일이었다.
충무공은 여름철에다 전투중이라 무거운 갑옷을 벗을 수 없어 총상을 입은 자리가 곪아 진물이 흘러내려 오랜 기간 고생했다는 기록도 나온다.
부상당한 충무공은 모자랑포 갯가 30여호가 살던 외진 곳에서 어깨에 박힌 총탄을 빼내고 하룻밤을 쉬어 갔다. 모자랑포는 지금의 사천시 노룡동 충무마을 주변이다.
이로부터 석달뒤인 8월 24일 모자랑포를 다시 찾았다가 짙은 안개로 바다 위에서 밤을 지새우고 이튿날 산분령(실안동)을 돌아 삼천포 앞바다를 거쳐 당포로 간다.
이와같이 충무공과 “사천해전”은 역사적인 배경으로 보아 관광자원이 되고도 남음이 있으나 팽개쳐 두고 있다.
이것이 말로만 “관광사천”을 부르짓고 있는 사천시 관광 행정의현주소다. 또 이런 사실을 마을 사람들조차 잘 모르고 있다.
현지에는 가로 60cm, 세로 50cm 가량의 팻말에 “난중일기”와 “당포파 왜병장”의 일부만 기록한 표지판 하나가 초라하게 세워져 있을 뿐이다. 그것도 도로변에서는 읽을 수 없이 반대로 세워져 두었고 바짝 다가서야만 겨우 읽어 볼 수 있다.

취재: 이동호 편집이사
4000news@naver.com

2010년 08월 19일 11시 07분 /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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