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바다를 여는 마을벌교(2)

다리는 건너 쪽 한 부분만 원래의 벌교교 모습 그대로이고 나머지는 대리석으로 홍교의 시늉만 내고 있었다. 벌교 사람들은 60년마다 이 다리에게 환갑잔치를 베풀어 준다고 한다. 환갑잔치상까지 받는 다리이고 보니 정말 대단한 다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홍교에서 남쪽으로 조금만 내려가면 소화다리(부용교)가 있다. 일제시대 소화 6년에 건립되었다고 하여 소화다리로 불린다 한다. 소화다리에서 필자는 한참이나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소설 속에서 좌익과 우익이 서로간에 사형을 집행하던 장소로 밀물 때 올라 온 바닷물이 온통 피바다였다는 가슴 아픈 역사를 간직한 다리라서 그러했을까. 우리 민족의 비극이 고스란히 서려 있는 듯해 떠나오는 발걸음이 몹시 무거웠다. 전라도 사투리로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겠구만이라··· 사람 죽이는 거 날이 날마당 보자니께 환장허것구만이니라···' 하는 피울음 섞인 주민들의 소리가 귀에 쟁쟁거렸다. 뿐만 아니라 소화다리에 얽힌 이야기는 또 있다. 왜놈 순사가 다리목에 지키고 있으면서 다리를 지나려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1에서 10까지' 왜놈말로 헤게 하여 다 헤지 못하면 다리 밑으로 가게 했다고 한다. 우리말 말살이 이곳에서도 있었단 말인가. 부용교라고 적힌 이 다리가 돌아서는 필자의 뒤통수를 섬뜩하게 했다.
소화다리를 떠나 벌교남초등학교와 일본식 건물인 남도여관, 4일과 9일에 서는 벌교 시장, 소설 속 염상구의 주요 활동무대였으며 빨치산들의 시체가 효시되고 후에 염상진의 시체가 효시된 곳인 벌교역을 지나 중도 방죽이 내려다 보이는 철다리로 갔다. 철다리에서 내려다 본 중도 방죽은 정말 서정적이었다. 이처럼 아름답고 전원적인 곳이 늘 그랬듯이 이 곳 또한 아픔이 서려 있기 마련이다. 하대치의 아버지가 한 뙈기 소작논을 얻기 위해 등뼈가 휘도록 돌동이를 져 날라 쌓은 중도 방죽, 소설 속의 그 방죽이 지금 필자의 눈 앞에 펼쳐져 있다. 소설을 읽지 않고 그냥 관광삼아 왔더라면 이 곳은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곳, 벌교 사람들의 시름과 꾸믈 담아 벌교천이 먼 바다로 떠나는 곳, 어쩌면 그들의 꿈을 저 열린 바다로 싣고가 꿈의 씨를 뿌리는 곳인지도 모를 중도 방죽과 벌교천. 꿈을 실은 벌교천과 개천을 따라 꿈의 흐름을 막은 중도 방죽, 적어도 그 당시는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그 방죽이 옥토를 지켜주는 울타리가 될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 방죽이 옥토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대치의 아버지를 비롯한 벌교 주민들의 휘어진 허리가 옥토를 만들었다고 믿고 싶다. 일본인 중도의 노동력 착취 현장이 눈에 선하다. 장딴지와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는 뺄밭에서 돌짐을 지고 방죽을 쌓는 우리의 아버지들이 보인다. 허리 휘게 개, 돼지 취급을 받으며 만든 저 방죽, 끼룩거리며 우는 갈매기들이 그 내력을 알고 저처럼 나래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어쩌면 저들이 당시 희생된 우리 아버지들의 넋일지도 모른다.
중도 방죽을 보고 돌아서는 순간 철다리 위로 낡은 열차 하나가 기적을 울리면서 지나간다. 벌교천에서 갈대숲을 베고 있던 공공근로자들이 일제히 허리를 펴고 상행선 열차를 바라보고 있다. 떠나 보내는 이가 없어도 멀어져 가는 열차가 쓸쓸해 보이는 건 무슨 까닭일까? 자꾸 뒤통수가 캥기고 눈물이 난다. 이제 벌교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그런가 보다. 우리를 안내해 준 여우삼 씨 등 벌교 사랑회 회원들에게 몇 번이나 정중히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우리는 벌교를 떠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