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수첩


다 적지 못한 아버지의 생애가 손때 묻은 수첩 빈 공간에서 귀향을 꿈꾸는 바람소리로 울고 있다 꽃버짐 지천으로 널리 문자들의 골목에선 어머니의 애간장 타는 세월이 물잎사귀로 묻어나고 있다 문패도 없이 밤낮으로 떠돌던 아버지의 고단한 꿈도 이젠 선산 모서리 다복솔과 함께 터 잡고 앉은 구절초 시린 목덜미에 하얗게 드러누웠다 아버지의 손때 묻은 수첩 빈 칸에서 섬의 잔가지를 거느린 채 아직도 쑥 냄새를 풍기며 닻을 내리고 있는 실안 앞바다 목선 위에 내려앉은 별들이 녹슨 대문을 흔든다 휘파람새 짧은 울음소리가 섬나리꽃으로 자물리는 산삐알밭은 썰물처럼 밤바다로 지고 있다 숨어 울던 파도소리 떼고함으로 몰려오는 자정 무렵 아버지의 소식을 묻는 익명의 바람들이 할머니의 부음을 해조음으로 더듬고 간다 아버지의 손때 묻은 수첩 빈 칸 귀퉁이에서 물기 번진 주소 한 켠이 어둠 끝자락으로 빛나고 있다

김경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