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을 때

난 ‘봄’하면 아무것도 모르던, 철없던 시절의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는 봄소풍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어렴풋한 기억속에는 나에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한 분이 계신다. 그 때가 아마 초등학교 1,2학년 때였으리라. 우리집은 그 때 가정 형편이 별로 안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겨울내내 움츠려 있던 만물들이 제 빛을 찾아가던 어느 봄 날 따스한 오후, 선생님께서는 갑작스레 소풍을 가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덧붙여 어머님이 함께 가시길 원하시면 같이 가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교실은 온통 종달새의 둥지가 된 듯 재잘재잘 거리는 소리로 정신이 없었다.

“우리 엄마한테 같이 가자고 해야지. 너 우리 엄마가 얼마나 이쁜지 모르지?” “난 우리 아빠도 데리고 갈 거다. 흥!! 통닭도 싸오고...” 하지만 난 그속에 차마 끼어들 용기가 없었다. 엄마는 보나마나 일때문에 못 오실거라는 걸 그때의 어린 나이로서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에. 친구들의 소풍얘기는 수업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때까지 난 초상집에 온 듯 그렇게 기죽어 있어야 했다.

잔뜩 풀이 죽어서 돌아온 나는 아무도 없는 빈집을 지켜야 했다. 어찌나 심술이 나고 걱정이 되는지 엄마가 매일 남겨놓은 메모지에 적힌 편지도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 편지 옆에 있는 500원짜리 동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는 늘, 아무리 돈이 없어도 오후 내내 혼자 있는 내가 심심할까봐 비디오 빌리는 돈 500원을 잊지 않으셨다. 그렇게 있다가 잠이 들었는지 눈을 떠 보니, 공장에서 오신 엄마가 저녁을 차리고 계신 것 같았다.

난 엄마에게 다짜고짜 말했다. “엄마! 나 내일 소풍가는데 엄마가 꼭꼭 가야한대” 난 이렇게 하면 엄마가 혹시나 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잠시나마 가졌다. “엄마 일하러 다니는 거 몰라? 그리고 엄마가 꼭 가야할 이유가 뭐 있니? 가서 너희들끼리 잘 놀면 되지” “아니야! 유치원 다닐 때도 나만 엄마가 안와서 엄마랑 하는 놀이에 선생님이랑 했잖아. 또 그 놀이 하면 어떻게” “니 맘대로 해라. 가든지 말든지...” 그러고는 엄마는 나가 버리셨다.

지금 그때 엄마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하면 내 자신이 한없이 초라하고 나약하게 느껴지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그날밤, 엄마는 연신 수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셨다. 아마 다니는 공장에 전화를 하셨던 것이리라. 하지만 결국 다음날 아침, 엄마가 내게 한말은 내가 밤새 기다리던 그 말이 아니었다. “수빈아! 혼자 다녀올 수 있지? 재미있게 놀다와.” 하시며 정성스럽게 싸주신 김밥을 내 손에 쥐어주셨다. 난 그때 엄마를 평생 싫어하겠다고 다짐한 것 같다.

하지만 그날 소풍에는 정말 몇몇의 엄마들밖에는 자리를 메꾸지 않으셨다. 그리고 난 덕분에 정말 재미있게 놀았다. 하지만 그때의 어린 나이로선 그저 다행이란 생각만 들었지,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난 엄마에게 친구들 엄마들도 많이 안왔다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환하게 웃으시면서도 나를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으시던 엄마의 모습은 난 차마 잊을 수도 없고 잊지도 않을 것이다.

지금 나에게는 그때의 나만한 동생이 있다. 며칠 전, 동생이 나에게 “누나. 나 14일날 봄소풍 간다. 좋겠지?” 하며 자랑을 쳤다. 그때 문득 그 추억이라면 추억이란 것이 떠올랐다. 그때 어머니의 마음을 난 지금으로선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내가 한 10년 후에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을 때만이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난 그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한 사람에게 말할 것이다. ‘어머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영원히 사랑합니다.”

<중등부 산문 장원 삼천포중앙여자중학교 3학년 임수빈>

선진리성에서 슬픔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꺼끌꺼끌한 아저씨의 살갗이 내 손등위로 억지스레 부대끼는 짜증을 참아야만하는 여기는 초만원 버스안이다. 아직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좀 한다는 여러 아이들의 열기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지고 속이 탄다.

아침에 학교에서 몇 명만 뽑아서 대회에 참가하는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시며 아직 눈꼽도 다 떼지 않으신채 엄마가 준비하신 된장찌개를 흐뭇한 마음으로 퍼 넣은 잘못도 있으리라. 흔들리는 버스안에서 나는 이렇게 후회하며 구겨진 교복을 손으로 두드린다. 출발전에 애써 닦았던 구두는 이미 여러 발자국을 마음껏 찍어 놓은지 오래다.

썩 내지키 않는 아침이다. 급하다. 아침녁에 흐뭇한 마음으로 먹었던 된장찌개가 이렇게 아침내 나를 괴롭힐 줄이야. 시뻘개진 얼굴로 번데기 장수 아저씨께 화장실을 묻고 뛴다. 그다지 순탄한 날이 아닌 것 같다. 담배 냄새 가득한 이 화장실엔 화장지가 없다! 오늘의 불운을 보기좋게 마무리 하는 것은 한 양복차림의 머리가 쭈뼛한 아저씨이다.

마이크가 울리고 나는 듣는다. 시제는... ‘선진리성에서’이다. 눈앞이 깜깜하는건 이럴 때 쓰는 말인듯 싶다. 학교에서 잘하고 오라고 침튀겨 가시며 넓적한 손으로 내 어깨를 두드려 주시던 여러 선생님들의 얼굴이 나를 괴롭힌다. 된장찌개와 엄마도, 그리고 엊저녁 엄마가 실컷 자랑을 늘어놓았던 나보다 밥을 더 많이 먹는 강아지 2마리를 가진 옆집 아줌마도... 봄은 신의 은총을 듬뿍 받은 계절임을 나는 감히 확신한다.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따스히 내리쬐이는 노란 햇살과 어울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한편의 시를 그리고 나는 지금 이곳, 이 아름다움이 가득찬 선진리성에서 돌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머리를 쥐어짜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내가 오늘 이곳에 보내어진 목적이며 내가 해야할 임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신의 은총을 외면하기엔 이봄. 바람이 너무나 시원스럽고 벚꽃이 너무 앙증맞게 하나둘씩 흩날리며 햇살이 너무나 간지럽게 내리쬐인다. 멋진 이곳. 선진리성에서 이봄 나는 미치고 싶다. 나는 바보이다.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을 바보라고 일컫는다면 나는 분명 바보인것이다.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이세상의 이면의 진실을 모두다 깨닫는 사람은 없다고 그럼에도 내가 바보인 이유는 단 한가지이다. 나는 늘 슬픔의 눈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집은 결코 부유한 편이 아니다. 그렇다고 남들 입을 때 헐벗고 남들 먹을 때 굶주리며 살 정도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공장에서 손에 물집이 터지도록 일하고 오시는 엄마의 어깨나 허리에 그 지긋지긋한 파스냄새를 맡아야 하는 것과 부끄럽게도 목욕탕에서 남의 시꺼먼 지우개 가루 밀린 것 같은 때를 밀어야 하는 아빠가 죽을만큼 슬플뿐이다.

나는 시장에서 콩나물을 살 때 조금더 얻기 위해 비굴한 웃음을 짓는 엄마가 슬프고 가끔 때를 편하게 밀고 돈 안내고 도망간 손님에 대해 얼굴을 붉히며 열을 내는 아빠가 슬프다.

주택은행에서 돈 갚으라고 전화오는 아저씨의 굵직한 목소리에 조금 주눅이 들어 짜는 듯한 목소리를 내야만 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미칠 것 같이 슬플 뿐이다.

누군가 나를 본다면 나에게 조금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슬픔속의 진정한 행복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선진리성에서 조그만 행복감을 느낀다. 그것은 단지 오늘 들은 지겨운 영어, 수학, 화학을 안하게 된데서 나오는 행복은 아니다. 요즘들어 부쩍 내가 자랑스러울 때가 많다. 그것은 이미 익숙해진 그 슬픔속에서 내가 찾아낼 수 있는 삶의 땀냄새가 물씬 풍기는 엄마의 푹신한 젖가슴과도 같은 행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간에 만족하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누군가 그러지 않았던가. 나는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하여 벚꽃 아름답게 흩날리는 이 선진리성에서 글을 쓰는 것에 만족하는 내자신이 매우 사랑스럽게 여겨진다. 이제 이 글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내 마음 깊은 곳의 슬픈 엄마는 현실속에선 너무나 밝은 얼굴로 아침에 먹다 남긴 된장찌개에 두부를 듬뿍 더 넣어 나의 점심을 차려주실 것이다. 아침에 먹다 남긴 된장찌개를 먹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 보면 그 슬픔속에 한없이 따뜻한 목이 메일 정도로 가득찬 행복이 들어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살아있다. 이곳 선진리성에서 나는 다시 한번 내 삶의 소중한 시간을 몸서리치도록 만끽하고 돌아가련다. 이 아름다운 봄날. 미칠 것 같은 봄날. 신의 은총을 가득 받은 이곳 선진리성에서... 슬픔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그 속에 담긴 가슴 저려오는 삶의 따스한 행복감에 다시한번 감사하면서...

<고등부 산문 장원 삼천포여자고등학교 2학년 정지운>

-2000년 5월 1일 ~ 5월 7일자 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