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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칼럼
코로나19! 공공의료 확충 필요성에 불을 지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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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의 역사와 유적지를 찾아서(35) 사천의 역원제(驛院制)

  사천시에는 조선 시대에 도성과 지방을 연결하던 교통 및 통신 제도로, 전국 주요 지점에 말을 관리하는 역(驛)과 숙소인 원(院)을 두어 나랏일을 보는 관리들이 이용한 사천의 관율역(官栗驛)·동계역(東溪驛), 곤양의 양포역(良浦驛)·완사역(浣沙驛), 삼천포의 문화역(文化驛)이 있었다.
지방을 연결하던 교통 및 통신 제도인 역원제(驛院制) 또는 참역제(站驛制)는 신라시대부터 있었다 하나 계통적으로 조직화 된 것은 고려시대로 전국을 22개 도(道)로 나누어 통치하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라 한다. 중앙에서지방에 이르는 주요 도로에는 대략 30 리마다 역을 두었는데, 기록에 의하면 1896년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대부분 폐지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찰방 23, 역승 18의 41개 驛道에 537개 역이 분속되어 있는데, 사천시는 18개의 역승도(驛丞道) 중 16개 역이 설치된 진주의 소촌역을 중심으로 한 소촌도(召村道)에 속해 있었으며, 곤양~남해, 진해, 사천~고성~거제 등지로 이어지는 역로이다. 소촌도의 역명은 다음과 같다. [召村(晋州), 常令(鎭海), 平居(晋州), 富多(晋州), 知南(宜寧), 背屯(固城), 松道(固城), 丘虛(固城), 官栗(泗川), 文知(晋州), 永昌(晋州), 東溪(泗川), 良浦(昆陽), 浣沙(昆陽), 烏壤(巨濟), 德新(南海)]
역(驛)은 공적 업무 수행을 위해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으로 공문서 전달, 출장자 지원 기능 이외에도 죄인 압송, 통행인 규찰과 유사시에는 국방 기능까지 담당할 목적으로 전국 주요 도로에 설치되었다. 원(院)은 교통의 요지인 역에 설치한 국립 숙박업소로 원주전(院主田)을 지급받아 원주(院主)가 이를 운영하며, 공무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였다.
역에는 대차(大車), 편차(便車), 곡차(曲車), 가마 등을 상비하고 있었고, 각 역에는 역장(驛長), 역리(驛吏), 역졸(驛卒), 역정(驛丁) 등을 두고 역로를 정돈케 하고 마필을 갖추어 출장관리로 하여금 이용케 했다. 관품에 따라 마문(馬文)을 발급하면, 상서원에서 그에 따라 마패를 내 주었다. 지방에서는 관찰사, 절도사가 발마패(發馬牌)를 받아 가지고 필요에 따라 사용하였다.
사천읍지에 의하면 관율역(官栗驛)은 사천현에서 북쪽 17리 거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옛 행정구역으로는 사천현 북면에 해당되고 지금은 사천읍 두량리 두량저수지 위쪽에 위치한 관율마을에 있었다. 동계역(東溪驛)은 사천시 정동면 고읍리 동계1리에 있었으며, 대마 1필, 역마 2필, 복마 3필이 있었고 역리 5인, 역노비 10인이 근무 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신 김을성씨의 선조들은 4대째 이 동계역에서 역장을 역임하였으며, 그 문헌이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로 등록되어 있다.
「곤양읍지」에는 양포역(良浦驛)은 곤양군 관아 서쪽 25리에 있고 남쪽으로는 남해 덕신(德信驛) 30리, 북쪽으로는 완사역 40리로 기마 3필, 역인 11명, 노(奴) 12명, 비(婢) 6구(口)라 기록되어 있다. 양포역은 진주를 거쳐 완사에서 남해(덕신역)와 중간지점인 하동군 진교면 양포리 산 100번지 부근으로 추측되며 곤양읍지 완사ㆍ양포역과 원의 기록에는 조선조 연산군 10년에 갑자사화로 남해로 귀양 가던 이세좌(李世佐: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져간 죄)가 남해로 귀양 가던 중 명을 받고 이곳 양포역에서 의금부도사 안처식에 의해 목매 처형되었다.
완사역(浣沙驛)은 조선 세종 12년(1430)에 남해 덕신역이 왜의 침범을 자주 받아 남해를 육지로 옮기면서 완사역을 설치하게 되었으며 곤양 동북쪽 18리, 동거 진주 평거역 35리 85보, 사천 동계역 45리, 북거 진주 정수리역 19리, 소남역 35리, 서거 하동 황보역 29리, 남거 하동 율원역 22리이며 기마 3필, 역마 3필, 역리 5인과 역노비 12인을 두고 봉계원은 관활에 두고 찰방(종6품)을 두고 있었다.
죽림동의 자연부락인 문화(文化)는 고려 때 진주 남면 말문리의 역촌방(驛村坊)으로 나타나 있는데 역마을이란 뜻에서 역촌방이 된 것 같다. 그러나 역명은 문화역(文知驛)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화역과 원우는 임진왜란 시 불타고 후에 죽사방(竹寺坊)으로 옮겨 다시 설치했다고 전한다. 죽사방은 오늘의 죽림동 죽계부락이다.
문화역에 큰 돈대가 있었고, 지금의 도원탕(삼천포중앙시장 동편) 우측 편 바다에 작은 돈대가 있었다. 역원(驛院)의 원은 일종의 국립여관으로 원우(院宇)라 하기도 했는데 늑도에 구라량원(仇羅粱院)이 있었고 문화에도 있었다. 소역인 경우는 지방수령이 부근 주민을 지정하여 원주(院主)를 시켰다. 늑도는 옛날의 구라도로 원우인 구라량원을 폐하고 말았다는 기록이 진양지에 있는 것으로 보아 구라량영이 폐영될 때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참고 문헌 : 사천향토사(창간호), 사천시사, 고려대학교 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

문화부장 김진식
kimarami2005@naver.com

2021년 01월 14일 11시 15분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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