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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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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의 역사와 유적지를 찾아서(37) 삼천포 쥐치포의 유래를 찾아서

  “꽃보다 먼저 봄을 물들인다는 화어(花魚)의 본산 삼천포, 1967년 삼천포의 명산물로 지정되었다.”
1906년 11월에 일본에 의해 삼천포항이 개항되었으며, 1964년 7월 11일에는 무역항으로 지정이 되고 1965년 6월 25일자로 대통령령 제2166호로 개항장으로 지정되었다.
삼천포는 일제 강점기 때는 경남에서 어획고가 가장 많은 항이었다. 당시 어업침탈을 위해 삼천포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팔포지역에 에히메촌(愛媛村)과 신수도에는 오이타촌(大分村)을 조성하고 일본인회(日本人會 : 1908년)를 조직하여 독자적인 자치단체를 만들었다. 이들 중 일부는 화어(花魚)와 건 멸치를 생산해 일본으로 수출했다.
일본 어민의 조선이주정책은 1883년 조일통상장정으로 일본 어선의 조선해 통어를 합법화 하고, 1908년 어업법의 제정으로 일본 어민들에게 동일하게 어업권을 인정하는 조취를 취하면서 본격화 되었다.
일본의 수산정책 중에는 지방자치단체나 수산단체 등이 계획적으로 건설한 이주촌을 “보조 이주어촌(補助移住漁村)이라 하고, 이주어민의 자력으로 어촌을 성립시키고 어업인이 이주하여 건설한 어촌을 자조이주어촌(自助移住漁村)이라 불렀다.
사천지역의 사천군 삼천포면 동금리(東錦里)의 팔장포(八場浦)에 세워진 에히메현의 에히메촌(愛媛村:1908 이주)이 보조이주어촌으로 주목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일본인들이 세운 사천지역의 보조이주어촌 건설이다.
1900년대 조선 내 일본인 이주 어촌은 100여개소인데 그 중 부산·경남지역 이주어촌이 50개소였다. 에히메촌인 경남 사천군 삼천포면 동금리 팔장포는 24호 67명으로 에히메현(Ehime Prefecture)의 단체이주어촌이며, 신수도에는 21호 54명으로 오이타현의 단체이주어촌이다.
삼천포항이 일본인들에 의해 개항되고 에히메촌이 건설되면서 오노 이꾸지(大野育二)의 회조부(回遭部)가 1906년 11월 창립되고, 1907년 11월 20일에는 서동 303번지에 우편소가 개설되었으며, 1908년에는 부산기선회사가 삼천포항에 취항하게 되었으며 1908년 5월 29일에는 일본인회가 결성되었다.
또한, 1909년에는 삼진회조부(三晋回遭部)가 창립되고 8월에는 전신업무를 취급하게 되었으며, 삼천포 경제를 독점·착취하기 위하여 설립한 국책 회사인 동양척식(주)가 있었고, 조선권업회사, 동척회사, 12월에는 법인인 수산회사(애원원해출어단체)가 설립을 보게 되어 삼천포지역의 수산업계(水産業界)를 장악하게 되었다.
생선을 조미하여 말리는 방법은 일제 강점기 부터 있어온 것이고, 삼천포에는‘화어(花魚)’라는 이름으로 그 흔적이 전하고 있어 쥐포의 역사를 일제 강점기 까지 끌어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1935년부터 대를 이어 화어를 가공하고 있는 신선수산의 김득주 씨는 “삼천포에서 개발된 것으로 일본인들이 즐기던 음식”이라 주장했다. 삼천포에서는 화어를 사쿠라보시(さくらぼし)라고도 하는데, 일본의 말린 조미 어포 중에 사쿠라보시라고 하는 것들이 있어 일본에서 유래한 음식일 수도 있다.
화어는 학꽁치·홍감평·밀지어·바닥대구·쥐치·가오리·복어·새우 등 8종의 생선을 원료로 국화·해바라기·장미 등의 모양으로 만들어 일본인들이 선물용으로 수출하기 위해 개발한 것이다.
머리와 뼈를 제거한 후 꼬리가 붙어 있는 상태로 조미하여 건조한 어포이다. 꼬리에 노란색과 빨간색 물을 들여 꽃처럼 보인다 하여 화어란 이름이 붙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건어물 생산자들은 사쿠라보시(さくらぼし)란 일본말을 안다. “사쿠라보시는 화어와 쥐포의 조상이다.” 다른 말로 미림보시(みりんぼし)라고도 부르는데 일본의 조미용 술인 미림으로 간해 말린 생선을 말한다.
삼천포지역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청정해역에서 잡히는 풍부한 어족자원과 다양한 어패류로 수산업의 전성기를 누렸다. 한땐 싹쓸이 조업인 일명 고데구리(소형기선저인망) 조업도 기승을 부리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전파한 어포기술을 적용한 화어(花魚)의 본산지로서, 1960년대 인근 남해안에서 쥐치가 대량으로 잡히면서 온 국민의 간식이 된 쥐치포 역시 발상지가 된 한편 일본으로도 수출된다. 쥐치포의 발상지인 삼천포는 주로 내수를, 여수는 수출을 주력한 덕에 삼천포 쥐치포는 쥐치포의 대명사가 되었다.
“1960년대 초반 남해안에서 쥐치가 대량으로 잡히면서 화어 어포(魚脯) 기술을 적용한 쥐치포가 이학조씨에 의해 만들어졌다.” 는 기록과 삼천포 쥐치포 생산자 영어조합법인의 설민우 사무국장은 “수산물검사소 출신의 故강봉희 라는 분이 일본에서 쥐포를 보고 와 1960년대 말에 이를 가공하여 일본에 수출한 것이 한국 쥐포 역사의 시작”이라는 말이 있다.
“일자리가 넘치니 외지에서 사람이 많이 들어왔다. 사람과 돈이 넘치고 삼천포는 북적거렸다.”
1970년대 초 쥐치포 가공 산업이 본격화 되면서 단일상품 수출 1000만 불을 기록할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천덕꾸러기 취급 받던 쥐치가 수산도시 삼천포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
그 당시 삼천포 앞 바다에는 어린애들의 줄낚시로도 쉽게 잡힐 정도로 많고 흔한 생선이었다(워낙 쉽게 잡혀 영명이 Fool fish일 정도이다). 거기에 잘 먹지 않아 어부들의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그래서 박정희 정부 때 어촌 수익창출 목적을 위해 남아돌다 못해 버리는 쥐치의 가공법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만든 것이 쥐포다.
삼천포 가가호호에서는 쥐치를 쥐포로 가공하는 수내가공업을 많이 하였다. 쥐치 가공공장의 허가업체는 20여 개에 불과했지만 일반 가정집 등 허가 받지 않은 가내 수공업자를 포함하면 200여 곳이 넘었다고 한다.
쥐치산업은 주로 주부들의 주 수입원이었다. 어머니들은 껍질 벗겨 포를 떠 고, 학교를 마친 아이들은 엄마 옆에서 쥐치의 껍질을 벗기며 도우 곤 했다. 쥐치의 살을 벗겨낸 머리와 뼈 부분은 개밥으로 주기 위해 오래되고 낡은 냄비에 넣어 한참을 팍팍 삶아 주면 개들이 잘 먹었다. 칼로 떼 낸 쥐치의 살은 잘 조미해서 발장에 널어 말렸다
1978년 10월 25일 삼천포화력발전소 건설공사의 착공 이후 1979년에는 건설 근로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1983년엔 1호기가 준공되었다. 총 48만평 부지에 화력발전소로선 국내 최대였다.
청정해역을 자랑하던 삼천포 연안 인근에 화력발전소가 건설되면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획량이 급감했다. 수온변화가 한 이유라고 알려졌지만, 무분별한 남획이 그 이유였다.
쥐치의 개체 수 급감과 같은 시기에 해파리가 한국 전 해역에 창궐하면서 근해 어장이 본격적으로 황폐화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해파리가 쥐치의 주 먹이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해수온이 높은 베트남 등지에서 쥐치를 수입해서 만드는 경우가 비교적 흔하다. 외국산 쥐치포로 상당량이 대체되었지만 두툼한 살집에서 나는 식감과 졸깃함의 삼천포 쥐치포는 크기도 작고 맛도 별로인 수입산 어포보다는 훨씬 낫다.
쥐포는 약한 불에 은근히, 느긋이 구워야 딱딱하지 않고 맛있다. 조미 건조한 쥐포는 짭짤하고 달콤한 맛이 일품이라 술안주는 물론 여러 가지 반찬에도 쓰인다. 그때만 해도 흔했기 때문에 가격도 저렴하고 여행갈 때는 꼭 가져가는 맛있고 좋은 영양 간식이 되었다.
“비린내 가득하고, 사람 넘치던 삼천포는 그렇게 긴 잠에 빠져들었다.”
수산물산업이 무너진 삼천포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아야 했다. 그 중 하나가 관광산업이다. 2003년 4월 28일 개통한 창선·삼천포대교와 육지와 섬을 잇는 사천바다케이블카의 운행으로 새로운 해양관광산업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고령화 사회를 맞이하여 사천시는 인구 20만 강소도시를 주장한지 수년이 지나가고 있다. 오히려 이전보다 인구가 줄어든 것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초등학교의 학급 수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으며 학교 간 통폐합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작년부터 사망자가 출생아보다 많아지는 인구 자연감소가 시작된다는 국가 통계가 나왔다. 인구감소는 결국에는 경제에 악영향을 미친다. 진정으로 미래세대를 걱정한다면 혼인과 출산 여건의 개선에 노력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사천읍의 중심지도 변화되고 있지만 삼천포도 역시 지금의 시내라고 지칭하는 구역과 실제 시내 역할을 하는 중심지가 다르다. 실질적인 시내는 벌용동 로터리 옆 단위농협 본소와 삼천포 공설 운동장 사이로 나름대로 상당한 번화가이다.
벌용동 아파트와 인근 주거지를 제외한 외곽지역은 젖먹이 애기와 보행기를 구경한지 오래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은 산아제한 운동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이 정책은 바로 국가 백년대계 발전에 역행한 꼴이 되고 말았다.
참고 문헌 : 삼천포시지, 일제의 조선어업 지배와 이주어촌 형성, 경상남도의 이주어촌, 박정배 음식칼럼리스트

문화부장 김진식
kimarami2005@naver.com

2021년 02월 04일 10시 41분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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