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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칼럼
사천시 공무원께 꽃다발을 드립니다.
한국인들은 스스로 자기 나라를 헬조선이라 불렀다. 낮은 행복지수, 높은 청년 실업률, 세계 1위의 자살률 등의 지표를 놓고 보면 한국은 지옥처럼 살기 힘든 곳이다. 하지만 최근 세계적으로 ...... 봉화칼럼 전체 리스트 보기
 
 
사천의 역사와 유적지를 찾아서 조선시대 사천의 옛길(17)

  1.국도 확장으로 사라진 창널모통이 비리길
한국지명총람에 장산리 배후의 천금산이 대곡리로 뻗어 내린 부웅더미 끝자락의 창널모퉁이에 바위벼랑을 깍아 만든 비리길이 있다고 나와 있어 설렌 마음으로 찾았지만, 그 자리는 이미 33번 국도를 확장하면서 벼랑이 크게 깍여 나간 상태다.
아쉬운 마음에 건점마을로 들어가 한실에서 도로가 이어질 만한 곳을 찾아보니 지금의 도로보다 약간 더 낮은 곳에 옛길이 잘 남아 있다.
부웅더미 기스락을 따라 남아 있는 옛길은 지금은 콘크리트로 포장하여 농로로 사용하고 있다. 그 길을 따라 건점마을로 드니 길가에는 향수어린 빨래터가 남아 있고 그곳을 지나자 곧장 건점마을 이다.
이 마을에는 아직도 곳곳에 돌담이 남아 있어 마치 어릴 적 고향마을을 찾아 온 듯한 느낌이다.
마을 이쪽저쪽을 살피며 걷다보니 마을 앞 느티나무 아래에 할머니 한분이 계셔서 건점과 한실을 잇던 옛길과 창널모퉁이의 비리길에 대해 이모저모 물어 보았다.
할머니께서는 자료에 확인한 대로 예전에 그곳으로 오간 길이 있었는데 도로 공사로 인하여 없어졌다는 말씀을 전해 주신다.
그 말씀을 뒤로 하고 건점을 벗어나서 그저 그 길이 이끄는 대로 길을 잡아가다보니 어느새 장산리의 으뜸마을인 대산 마을이다.
이 마을 북쪽 배방골은 산 너머(서쪽) 성황당산 자락에 유배 와 있던 왕욱의 아들인 현종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배방사(排房寺)가 있던 곳이다.
2. 장산리 몽대마을
장산리에서 으뜸가는 마을은 배방골 초입의 대산인데, 달리 몽대(夢垈)라고도 한다. 그것은 임진왜란 때 경상도에서 활약한 삼룡 가운데 한 분인 주몽룡(朱夢龍)의 태몽에서 비롯한 이름이다.
한국지명총람 9에는 그의 어머니가 애를 배었을 때, 아버지의 꿈에 동쪽에서 온 청룡이 방으로 드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이름을 몽룡이라 하고 그 마을을 몽대라 했다고 한다.
뒷날 주몽룡이 금산 군수로 재임하고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 정기룡, 등과 함께 거창 우지현(牛旨峴) 전투를 승리를 이끌었고, 그 뒤로도 경상도 곳곳에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강덕룡, 정기룡과 함께 삼룡(三龍)장군이라 불렀다.
마을 한 가운데 있는 별묘는 사천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구암 선생 이정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선생은 명종 연간에 경주부윤으로 재임할 적에 신라 왕릉을 크게 수리하였고, 벼슬에 물러나서는 살든 곳에 구암정사를 지어 날마다 유생들과 더불어 강학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60세에 몰하니 만죽산 남쪽 기슭(사천읍 구암리 구계서원 맞은바라기)에 장사지냈다. 이 무덤은 임진왜란 때 왜군들에 의해 도굴되어 지금도 그 자리에는 석곽만 남아 있다.
3.사천강 가의 험한길, 가메바우
몽대를 나서 마을 뒷산이 코끼리가 엎드린 형국을 하고 있는 복상(伏象) 마을 들머리는 예전에 장이 섰던 곳이라 저자거리라 불린다.
복상마을에서 남쪽으로 길을 대어 시리봉 기스락으로 난 길을 따라 옛 가곡원이 있던 만마(萬馬) 마을에 든다.
가곡원(可谷院)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사천현의 역원에 “현 동쪽 20리에 있다” 고 나오지만, 여지도 사천 역원에는 원집은 기로할 만한 내용이 없다고 나온다.
이곳 만마가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이었음은 가곡원과 가메바위 가까이의 파발 등이란 지명으로도 알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곳을 통과하는 길이 험하였음을 전하는 이야기도 있어 살핀다.
바로 이곳 만마에 있는 가메바우 전설이 그것인데, 전하는 말에 예전 어느 날 가마타고 신행을 가던 중 앞에서 가마를 메고 가던 가마꾼이 발을 헛디더, 길 아래 소(沼)에 떨어져 모두 익사 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대곡리에서 객방에 이르는 구간이 사천강의 공격을 받아 비탈이 가파른 바위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리로 온 길을 오가면서 사고가 잦았음을 일러주는 단적인 예다.
달리 비리길에 대한 이야기를 찾을 수는 없지만, 가메바우 주변에는 사리봉 자락의 바위 벼랑을 깎아 만든 비리길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길에서 마주 보이는 골짜기가 고자실이니 저 고개를 사이에 두고 아비와 어린 자식이 애 끊이던 안타까움이 천년 세월을 두고 전해지는 듯하다.

참고문헌: 사천의 역사와 문화이야기(2015.김을성). 사천의 옛길과 고려 현종(재)두류문화연구원장 최헌섭)

본지주필·사천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김을성

2020년 05월 21일 11시 13분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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