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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칼럼
사천해전과 거북선(1)
1592년 5월29일 새벽 여수를 출발한 전라좌수영 수군들은 23척의 판옥선에 승선하여 일자진을 펼친채 사천으로 향했다. 부지런히 노를 저어 남해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와 ...... 봉화칼럼 전체 리스트 보기
 
 
동계와 동계역 지명 유래 조선 시대의 교통과 통신 전달

  사천들(고랑들) 남쪽 가장자리에 있는 아늑한 전원마을, 진삼선 국도에서 왼손 편 동쪽에서 약 1km 지점이며 마을은 들녘과 내를 향하여 조금 높다란 둑(제방) 하나로 서쪽은 동계 2리, 동쪽은 동계1리 마을 이다. 지금의 동계1리 마을이 동계역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으로 부터 600여년 전 사천현(사천시)에 역이 들어서면서 신역이라고 하였다가 다시 동계역(지금의 정동면 동계(뎅기)라고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역이 있었다는 뜻으로 역촌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흔히들 자기가 살고 있는 동계 지명을 호칭할 때, 동계라고 부르지 않고 뎅기라고 부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동녘은 동(東)자를 뎅이라고 발음 한데 불과하다. 그러면 동계라는 지명은 언제부터 불렀을까? 그 유래를 살펴보자.
<세종대왕연보>에 의하면 세종19년(1437)11월초에 “경상도 함안현의 신역은 파수로 하고 사천현의 신역은 동계로 고쳐 부르기로 하다”로 되어 있다.
약 600여년전 부터 역이 설치됨으로서 동계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역촌이라는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동계라는 지명은 그 입지 조건으로 보아 전혀 걸맞지 않은데도 왜 동계라고 했을까? 마을에 사는 노인들에게 물어보아도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 다만 사천강의 한 물줄기가 옛날에는 이 마을 한 가운데를 흘러 내렸는데 마을 위 동쪽에 깊은 늪과 연못이 있었다.
이로 미루어 동계의 동자는 떠오르는 해가 나무에 걸렸으니 곧 동녘이지만 크다는 뜻이며, 계자는 시내 계와 동의어로써 큰물이 흐르는 시냇물이 있다는 뜻으로 지은 지명이 아닌가 싶다. 지금도 동계마을에는 시냇물이 사시장춘 흐르고 있다.
조선시대 때에 사천에는 두 개의 역이 있었다. 하나는 관용 또는 군용의 대표적 육운의 교통 통신기관으로 가장 확실시하고 상세한 정보 연락 수단으로 아주 중요시 했다.
특히 조선시대의 역은 전국적으로 그 규모가 방대하였는데, 지방에 이르는 주요 도로에는 대개 30리마다 역을 두어 역마를 배치하여 공문 전송 이외에 공무 여행자에게 역마를 제공하고 그 밖에 진상, 토산품의 공납물 수송 등을 담당케 하였다.
역마의 이용을 위해서는 그 허가증인 마패가 발급되었다. 관리들의 품계에 따라 마패수의 차등이 있었으므로 발급되는 마패에는 소정의 수대로 마필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각 역에는 역장, 역리, 역졸 등을 두어 역의 관리와 공역을 담당케 했다. 또 역에는 대로, 중로, 소로의 셋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동계 역은 대로의 찰방역인 소촌 역(종 6품 역/현. 진주시 문산읍 소문리)에 소속된 소로에 해당한 역이다.
역을 관리하고 운영하기 위해 역위전이 지급되었고 대로는 20결(논, 밭 단위)중로는 15결, 소로는 5결이 지급 되었다.
역의 장은 2결, 부장은 1결50부, 급주졸은 50부를 주었으며, 마전은 대마 7결, 중마 5결 5부, 소마는 4결이다.
소로역인 동계 역은 대마 1필, 역마 2필, 복마 3필이 있었고 역리 5인, 역노비 10인이 근무 했다.
조선시대의 호적단자를 보면 사천읍 사주리 김을성씨의 선조들은 대대로 역장을 세습했다. 즉, 사천현 상주내면 동계리 제3통 3호역에 본적을둔 김병순(김을성의 6대조)은 1760년도에 당시 동계역의 역장을 역임했다
증조 유관, 조고 성담, 부조 철득, 4대가 내리 역장을 지냈다.(문헌 자료: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636호 2017.4.13.)(진주 문산 알미산 사천 사주리 김해 김씨 삼현파 문종 제공)

김을성 기자 kimes4000@naver.com

2020년 01월 09일 11시 13분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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