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햇살 헹구는 갈대 숲, 순천만

지난 여름, 벌교에 갔을 때 시간이 없어 가보지 못했던 순천만을 몇 년 전, 한 번 다녀온 적이 있었지만 이 가을에 꼭 한 번 더 가고 싶었다. 지금쯤 갈대들이 온통 하늘에다 가을을 그려 놓고 있을 것이리라. 가을 햇살이 유난히 따사롭다. 지난번 문학기행때 짙푸르던 벼들이 이제 모두 누렇게 익어 고개지고 있었다. 대학시절 을숙도의 갈대밭에 가본 적이 있다. 내 추억의 책갈피에 꽂아둔 기억들 중,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채색된 하나가 을숙도 갈대숲을 찾은 일이다. 갈대숲 사이 뱃길이 나 있고 그 길을 따라 노를 젓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순천만에 이르렀을 때 필자는 을숙도에서 받은 감동만큼이나 아득한 감동을 받았다.
망망한 바다와 뻘을 곁에 두고 바다의 모습으로 누운 갈대밭, 정말 가슴이 뭉클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우리 인간은 늘 바다를 동경하여 바다 가까운 곳으로 밀려 드는데, 어찌된 일일까? 수많은 갈대들이 한결같이 고개를 묻 쪽으로 외셔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날카로운 잎을 달고 온몸은 휘어지면서도 바다와 맞서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아, 『태백산맥』의 무대인 벌교에서의 민중들의 삶을 여기에선 갈대드레게서 찾을 수 있다니, 이 또한 무슨 운명의 놀음이란 말인가? 어디에 가더라도 지배와 피지배가 있고 억압과 저항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런 이치 속에서 사랑도 존재하는가 보다. 사랑과 미움, 있고 없음, 아래와 위가 모두 자연의 섭리대로 잘 다스려지는 곳이 있다면 얼마나 이상적이겠는가. 이 자연 속에서 헤결의 변증론을 읽고 가다니. 오늘 필자는 갈대와 바람 사이에서 하나의 조화로움을 찾고 간다. 지난 여름 답사를 떠날 때 품은 화두를 지금 다 풀고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실마리는 찾았다는 것이 큰 수확이 되었다.
내가 갈대라면 세상은 바람이어야 했다. 세상이 갈대라면 내가 바람이어야 하는 까닭을 나는 순천만 갈대들이 넘기는 책갈피에서 읽고 간다. 정말이지, 이 가을에 징한 사랑 하나 낳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