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머큐롬 한 방울
1950년 12월, 북한을 수복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철수하자 우리는 그 뒤를 따라 월남, 포항(浦港)에서 피난할 때의 이야기다. 우리가 묵던 곳은 포항의 북쪽변두리 토굴 같은 단칸방이었다. 그러나 그런 곳이라도 구했다는 것은 행운이 따랐다는 이야기다. 먹을 것이 없는 일행은 부두에 나가 미군의 군수물자 하역작업을 하면서 눈치껏 배를 채우던 시절, 그러나 몸이 허약했던 나는 피란 방에서 일행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문 밖에서는 아이들이 놀고있는지 시끌벅적 떠들더니 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달려 나가보니 한 아이가 비탈길에서 미끄러져 종아리에서 피가 조르르 흐르고 있었다. 그 때 마침 호주머니에 있는 머큐롬 분말이 생각났다. 이 분말은 물을 타면 머큐롬 액체가 된다. 재빨리 물에 풀어 아이의 종아리에 발라주고 방에 들어와 있는데 얼마 후 밖에서 누가 찾는 경상도 사투리가 들려왔다. 잘 들어보니 어떤 중년 남, 여가 나를 찾는 목소리였다.
나가 보니 조금 전 머큐롬을 발라준 아이의 부모가 찾아와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처음 듣는 경상도의 억센 사투리지만 나에게 하는 인사가 분명했다. 그들은 나를 의사선생이라 호칭하면서 오늘저녁 식사는 자기 집에서 마련했으니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피난생활을 시작한 이래 굶기를 밥먹듯 하던 나에겐 귀가 번쩍 뜨이는 반가운 소식이지만 일행을 생각하면 괴로운 일이었다. 나 혼자만 가자니 미안하고 그렇다고 일행과 함께 갈 처지도 못되고, 할 수없이 일행의 양해를 구하고 나 혼자 식사대접을 받았다. 그 집에 가보니 단칸방에 사는 가난한 부부라는 사실을 알게되었으며 그러기에 더더욱 그 내외를 잊을 수가 없다. 경상도 사람을 대해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지만 머큐롬 한 방울에 그토록 마음쓰는 순진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다음날 아침에는 옆에 산다는 일가 집에서, 그 다음은 역시 일가라는 다른 집에서 초대받은 일이 어제 일처럼 생각난다.

(2) 피는 물보다 진하다
포항을 떠난 우리일행은 대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것은 무슨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대구에는 족인(族人) 들이 많이 살고 있다는 소문이 우리들의 마음을 그쪽으로 끌고 갔는지도 모르겠다. 이런걸 가리켜 ?핏줄에 끌린다? 라고 하는 것인가 보다.
영천(永川)까지는 아직도 2, 30리 더 가야 한다는 어느 날 저녁 우리는 저무는 해를 원망하면서 큰길에서 멀지 않은 어떤 집에 들려 하룻밤 재워줄 것을 간청한 일이 있었다.
집주인은 우리의 초라한 행색을 살피더니 차마 거절은 아니했다. 그는 우리의 신분을 물었다. 우리는 함경도에서 왔으며, 원산(元山) 앞 여도(麗島)에서 조각배를 얻어 타고 죽변(竹邊) 북방에 상륙하여 동해안을 줄곧 걸어서 이 곳까지 오게된 경위를 소상히 말했다. 그는 다시 성씨를 비롯하여 이것저것 물었다. 우리가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했더니 그의 태도와 말씨가 갑자기 달라지면서 ?그럼 우리의 일가가 아닌기요??하더니 꽁꽁 얼은 나의 두 손을 덥석 잡아주는 게 아닌가? 순간 코끝이 찡하며 볼에 흐르는 무엇을 느껴보았다. 우연히 같은 족인을 만났든 것이다.
그는 아이들을 시켜 이웃에 사는 친척을 불러오게 하는 등 그렇게 반가워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던 가족이나 대하듯 한 그런 태도였다.
그들은 이 마을에 서씨(徐氏)가 많다면서 며칠이라도 좋으니 푹 쉬었다 가라고 했다.
나는 그때 그들이 베풀어주던 호의를 지금껏 잊어본 일이 없다. 그러나 그 마을 이름과 그들의 이름을 잊은 것이 후회된다. 하지만 그 고장이 고경면(古鏡面)이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들이 우리를 육친(肉親)의 정으로 대해주던 그때가 벌써 50년이 넘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의 뜻을 나는 이러한 체험을 통해 확실히 느껴보았다. 그들의 말소리는 억센 경상도 사투리여서 그 말에 익숙지 못했던 나는 그들의 말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말속에 숨은 애정의 순수성은 충분히 감지할 수가 있었다.

아무튼 머큐롬 한 방울에 감동 받은 포항인의 순수한 정서, 초면의 피난민을 육친의 정으로 쓰다듬던 영천인의 따뜻한 정서, 그들은 모두 무뚝뚝한 사람 같지만 부드럽고 아름다운 심성은 영남인의 공통된 정서인 것 같다. 난리 속 흉흉한 민심과 그 겨울(1951년, 1월) 바람은 매서움이 있어도 내가 만난 영남인의 따뜻하고 훈훈한 인간미는 결국 나를 울려놓고야 말았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었을지도 알 수 없는 그들, 인정미담(人情美談)은 반세기가 넘은 오늘날에도 나의 가슴속에 살아있어 지울 수가 없다.


< 筆者 : 徐元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