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원 용 -

종착역을 향한 급행열차에서 지난날을 뒤돌아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그 중에서도 오직 한사람 朴日羽 선생을 잊을 수 없다. 노룡동(魯龍洞) 출신의 퇴직교사(?), 그를 만난 것은 불과 10여일, 대화는 불과 10여분, 그러나 그가 벌써 5년째 해마다 한번씩 단감을 선물로 보내온다. 놀라운 일이지만 이유도 말하지 않고 물어도 대답이 없다. 무조건 보내오는 단감의 요상한 맛은 내 가슴 깊은 곳에 잊지 못할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다.
1997년 5월 초, 각지에서 모인 퇴직교사 10여명은 교원공제회(敎員共濟會) 주선으로 부부동반, 중부유럽 7개국을 다녀온 일이 있다. 朴 선생은 그때에 알게된 분이기에 낯설고 서먹서먹하여 만나면 눈인사정도 나누는 처지였다. 여행에서 만나본 그의 인상은 예의 바르고 침착하고 과묵한 분 같았다. 그해 11월 초순의 어느 날 소포가 배달되었다하기에 받아보니 사과궤짝으로 가득 단감이 들어있었다. 이상히 여겨 발송인을 보니 “경남 사천시 노룡동 朴日羽(전화:834-4949)”였다. 처음 보는 이름이라 朴日羽가 누구일까? 조사해보니 그해여름 유럽여행의 동지였다. 그러나 그분이 감을 보내올 이유도 없거니와 그걸 보내달라고 주문한 사실도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숙제는 풀리지 않았다. 그러나 보내온 감이니 모두들 나누어 맛있게 먹기는 했다.
1년이 지난 1998년 11월 초순에 또 감이 배달되었는데 역시 朴 선생이 보낸 것이었다. 나는 놀랐다. 여행동지라는 정으로 한번쯤은 혹 있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두 번까지는 정말로 뜻밖이었다. 그렇다고 무슨 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여행기간에 있었던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흔히 여행을 하다보면 몇 시간씩 장거리를 달려야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남녀가 빈자리에 끼리끼리 모여 앉아 잡담을 나누거나 여흥을 즐기는 일이 가끔은 있다.
그러나 나는 자리를 고수하면서 차창 밖을 달리는 이국풍물을 바라볼 뿐 그들과는 별로 어울리지 못했다. 그들도 내가 일행 중 최고령(당시 77세)이라 그런지 합석하기를 바라지 않는 눈치였다. 여행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나는 용기를 내어 무작정 일행과 합석하고 말았다.
일행의 화제는 1940년경 널리 보도된바있던 어느 일본인 고교생의 이야기였다. 철학에 관심 있는 그 학생은 “인생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인생은 불가해“라는 결론 끝에 폭포(게곤노 다끼)에서 투신자살했다는 그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다. 그는 투신하기 전에 글을 남겼는데 그 것이 천하의 명문장으로 당시 입시문제로도 출제된 일이 있었다는 등 이야기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글의 내용이 그날의 주제였던 것 같다. 일행 중 그 문제에 가장 관심 깊은 분은 朴 선생 같았다. 수첩을 꺼내들고 기록하는 적극적인 자세였다. 朴 선생은 하나하나 확인하였지만 모두들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朴 선생은 마침내 나에게 물었다. ?徐 선생님은 혹시?? 내가 ?글쎄요 어쩌면 기억이 살아날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바싹 다가앉으며 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마침 옛날에 보았던 생각이 떠올라 그 내용을 모두 외울 수가 있었다. 그러자 朴 선생은 일어(日語)로 된 그 말을 수첩에 기록하는 치밀성을 보였다. 그리고 나는 자리에 돌아온 일 밖에는 없었다. 말하자면 10여일 여행기간 朴 선생과의 대화는 그것이 전부였다. 서로 만나 눈인사쯤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것이 단감을 2년간이나 공짜로 받아먹을 만큼 대단한 일이라고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나는 朴 선생의 심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또 1년이 지난 1999년 11월 초순의 어느 날 생각지도 않았던 소포가 배달되었는데 물론 단감이었다 나는 괴로웠다. 값도 값이려니와 그 정성과 수송비는 또 얼마나 될 것인가? 80평생 많은 사람들을 겪어보았지만 각박한 세상에 이런 분도 있었던가? 2000년 7월, 강원도 속초에서 어떤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나는 자진하여 마이크로 “내 인생의 체험담”이라 전제하고 “朴 선생과 단감”에 얽힌 이야기를 한일이 있다. 모두들 놀라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사천인의 아름다운 정서를 소개하는 한편 병 들어가는 사회, 실종된 도의를 개탄하는 말도 했다. 그날 내 말을 들은 어떤 친구는 몇 개월 후에 나를 만나자 ?금년에도 그 감이 왔던가요??라고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놀라는 눈초리로 당연한 말을 물었다는 듯이 야릇한 표정을 지은 일이 있었다.
남양주로 이사온 작년가을(2001년 11월 3일) 단감은 또 배달되었다. 연속 5년째, 아! 내 인생 초라한데 무슨 말을 더 하랴! 나는 호젓한 내 가슴 깊은 곳에 泗川人의 아름다운 정서를 고이고이 간직하리라. 그도 이제는 80대의 고령, 어쩌면 이승에서 다시는 만나지못할지도모를朴선생의얼굴을눈앞에그려보며두어자소감을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