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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물패 ‘반곱슬’의 유럽여행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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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로마에서의 재회
다들 로마의 날씨에 지쳐 보인다. 구름 한점 없이 맑은 하늘은 오히려 뜨겁게 열기를 내뿜는 태양 때문에 원망스럽다. 이탈리아는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써 아직 여름이 되지도 않았는데, 온도가 30도에 육박하고 공기가 아주 건조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쾌적한 알프스의 공기를 마시다가 갑자기 찾아온 듯한 지중해의 여름에 몸이 적응이 안 되었는지,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고 나가서 관광하는 것 자체가 귀찮아 진다.
이런 날씨에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게 신기할 정도다. 로마 사람들은 지금까지 보았던 유럽 사람들과 다르게 얼굴을 찡그리며 걸어다니고, 여유가 없어 보이는 것도 이런 날씨 탓인 것 같다. 아마 우리도 여기서 한 일주일 정도 지내고 나면 그들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다닐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문제는 날씨만이 아니다. 지저분한 거리와 불친절한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여기가 과연 유럽이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 특히 여기 로마는 소매치기학교가 있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소매치기도 많고 치안도 제대로 유지가 안 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곳곳에 경찰들이 눈에 띈다. 그렇다고 해서 안정감을 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많은 경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더운 날씨에 사회의 분위기가 더 갑갑하게만 느껴진다. 로마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열정이 풍부한 나라 이탈리아에서 풍물공연에 대한 기대를 크게 가지고 왔는데, 저 많은 경찰들의 눈을 피해서 공연을 할 생각을 하니 막막하기만 하다.
하지만 새로운 도시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 것도 잠시. 더운 날씨에 지쳐 일찍 민박집에 왔더니, 민박집으로 하나누나의 전화가 왔었단다. 저녁에 로마에 도착할 거라고. 그리고 풍물치는 팀도 와 있냐고. 하나누나를 로마 테르미니 역까지 마중 나가자는 나의 제안에 다들 내가 하나누나를 아주 보고 싶어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선뜻 응해 주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하나누나를 보고 싶어 했다.
하나누나를 실은 기차가 역 안으로 고개를 내밀자, 다른 사람들이 나보고 하나누나를 보면 유럽식으로 포옹이라도 해주라고 은근히 부추긴다. 그 말에 얼굴이 약간 달아오른다. 그리고 한 무더기의 인파 속에서 하나누나가 여전히 웃음을 띠며 우리 쪽으로 걸어 나왔다. 나도 입가에 환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별 말없이 슬그머니 누나의 끌낭을 건네 받았다. 사람들이 나보고 싱겁단다. 그래 그렇게 기대하던 만남치고는 싱겁긴 하다. 하지만 그런 만남도 이루어지고 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편해지기는 하다. 오히려 만남을 기다리고 있는 순간이 더 설레이는 법이다. 이제는 여행 중간에 만나서 헤어질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유럽여행을 마칠 때까지 함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조바심도 없어지고 다만 편하고 좋을 뿐이다.
경상도 사천 분이신 민박집 아주머니는 우리와 같은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특별대우를 해주셨다. 마침내 비어있는 이층 다락방 전체를 우리 팀과 하나누나가 함께 쓸 수 있게 해 주셨다. 우린 그 때부터 가족처럼 지냈다. 미애누나는 큰누나, 효경이 누나는 둘째 누나, 하나누나는 막내누나, 장남인 나, 그리고 우리 막내 동진이. 밤늦게 까지 뭐가 그리 재밌는지 낄낄대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경상도 특유의 억양으로 민박집 아주머니가 “이층 문딩이들아. 불끄고 자라!”라고 큰소리로 몇 번을 말해야 겨우 불을 끄고, 그러고도 서로 각자의 침대에 누워서도 소곤거림이 그치질 않았다.
뒷날 아침, 우리는 오랜만에 활기찬 얼굴로 아침 일찍 일어나 나갈 채비를 했다. 오늘은 뒤늦게 온 하나누나를 위해 우리가 로마시내 가이드를 해주기로 했다. 로마는 곳곳에 유적지와 관광지가 있어 대중교통을 거의 이용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도 아침부터 콜로세움을 거쳐 팔라티노 언덕, 진실의 입까지 많은 시간 동안 걷다보니 벌써 옷은 땀으로 흥건하다. 그래서 돌아가는 길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했다. 원래 대중교통을 이용해봐야 그 나라의 이면까지 볼 수 있는 법이다.
로마의 대중교통은 정말 불편하게 되어 있다. 특히 표를 구하기란 외국인에게는 하늘의 별따기다. 자동판매기는 있어도 거의 작동이 안 되거나, 사용법도 정말 복잡하다. 나중에야 요금의 끝자리까지 잔돈을 맞춰서 돈을 넣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잔돈이 없어서 표를 못 구하거나, 나처럼 작동법을 몰라 몇 번을 돈을 넣었다 뺏다 하면서 줄을 서 있다. 그 날은 버스표를 구하기 위해 안내책자에 적힌 대로 담뱃가게를 찾아 다녔건만, 그들이 하는 말은 다른 곳으로 가보라는 말뿐이다. 그렇게 혼자서 표를 찾아 헤매다가 결국 세 정거장 정도 되는 거리를 걸어서야 표를 구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표 사러 갔다가 한참을 오지 않던 나를 걱정하던 사람들은 결국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며 구해온 표를 흔들자 의지의 한국인이라면서 한바탕 웃었다
그렇게 우쭐했던 탓일까? 나는 결국 우범지대의 중심지에서 긴장을 풀고 말았다. 버스에 내려 지하철을 갈아탔는데, 거기서 소매치기를 당하고 말았다. 로마의 지하철은 소매치기가 많아서 가방을 앞으로 매고 꼭 껴안고 있으라고 로마를 오기 전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건만, 순간의 흐트러짐에 당하고 만 것이다. 그것도 내 가방에 들어 있던 효경이 누나 카메라였다. 괜히 누나에게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 항상 그렇듯이 나는 내 능력의 한계를 드러내면서 소심해진다.
내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자, 나서서 무언가를 할 수가 없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효경이 누나는 웃으면서 괜찮다고 그런다. 하지만 한번 쪼그라들었던 자신감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저녁에는 풍물공연을 하기로 되어 있는데, 이런 분위기로는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을 것 같다.
그동안 자의로 여행의 리더를 맡으며, 혼자 벅차하다가 실수도 많이 했다. 그 때마다 벅찬 일을 일부러 떠맡으면서 그 속에서 혼자 부딪히며 괴로워한다. 그러면서 괜히 혼자서 풀이 죽어버린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고비를 잘 넘겼다. 어쩌면 로마에서 첫 공연이라 더 부담될 수 있었지만,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는 다른 큰 도전이 필요했다. 방황 속에 풍물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나니, 하루 동안의 찌듦과 짜증을 모두 털어 낼 수 있었다. 이제는 소매치기 당한 것을 자랑처럼 떠벌리기까지 한다.
끝까지 추락하다가 다시 떠오르는 기분은 정말 즐겁고 보람차게 느껴진다. 이런 밤은 참 즐겁다. 여행이란 이렇게 조금씩 시련이 겪고 그것을 극복하는 맛인 것 같다. 오랜만에 치열했고, 즐거웠다.
2003년 07월 31일 11시 24분 / 문화 Copyright (c) 1999 사천신문 Co.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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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칼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