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신문 | 봉화대(생활광고) | 사이버사천
2017. 09.22 17:00

곤양면(昆陽面)

신라 이전에는 포상팔국(蒲上八國)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지명이 정확하지가 않다. 고려 때에 곤명현으로 불리어지다가 고려 현종 9년(1018)에 진주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 초기 태종 때까지는 곤명현에 속하였고, 현의 현기(懸基)는 지금의 곤양면 본촌리 또는 곤명면 금성리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 세종 원년(1419년) 3월에 남해현을 합하여 곤남군(昆南郡)으로 승격하였다. 이때 읍기(邑基)를 현재의 성내리로 이전하였다. 세종 원년에 곤명현 은사리 소곡산에 세종의 태를 안치하였다. 세종 12년(1439년)에 곤양읍성은 완성하였고 세종 19년에는 진주의 남해현을 다시 떼어 내어 대신 금양부곡(金陽部曲:진교, 금남)을 합하여 곤양으로 고쳤다. 고종 32년(1895년)에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에 23부제를 실시하면서 사천군으로 편입하였다. 이듬해 23부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13도(道)제로 개편할 때에 곤양을 다시 군으로 회복되어 사천군과 함께 진주부관할로 되었다.

곤양은 495년 동안 곤양군의 중심이었다. 곤양군 때에는 동부면, 가리면, 서부면, 양포면, 금양면, 서면, 초량면, 소곡면, 성방면, 곤명면의 10개면을 관할하였다. 1907년 지방행정구역 정리 시 동부면과 가리면 2개면을 하나의 면으로 합쳐지게 되었다. 동부면에는 9개의 동리가 있었는데 성내리, 서정리, 송정, 가전리, 사동, 포곡동, 대진동, 남문외촌, 동정동이 그것이다. 가리면에는 10개의 동리가 있었는데 본촌동, 환덕동, 탑동, 중항동, 가화동, 제방동, 묵공동, 검정동, 갑사동, 흥곡동이 그것이다. 일제에 들어 1914년 4월 군면 폐치 분할에 따라 곤양군을 없애면서 땅을 갈라서, 서면과 금양면은 하동군에 속하게 하고, 다른 땅은 사천군으로 병합하였다.

1983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포면의 무고리와 맥사리를 곤양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 7월 1일부로 도농통합 추진과정에서 구 사천군과 구 삼천포시가 합하여 사천시로 되면서 사천시 곤양면이 되었다. 동쪽은 축동면, 남쪽은 서포면, 북쪽은 곤명면과 진주시 내동면과 접하고 있다.

● 곤양의 자랑거리
대개 알려져 있는 것은 송전리 곤양향교, 흥사리의 매향비(국보 614호), 무고의 보안암석굴(도지정 유형문화재 제39호), 성내리의 비자나무(국가지정 천연기념물 287호), 면사무소 밑의 비석군, 곤양읍성, 우산봉수(도지정 기념물 176호) 등을 들 수 있다.

비석군은 본래 곤양초등학교 앞에 있었던 것을 이전하였다. 현 곤양초등학교 자리는 조선시대까지 관청의 자리였다. 이 비석들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20세기 초엽에 모은 것이라고 한다.

곤양은 고려 때 곤명현으로 불리어진 이래 지명에 곤이 따라 붙는다. 세종 때 곤명의 “곤”자와 남해의 “남”자를 따서 “곤남군”으로 하다가 남해가 분리되고 금양부곡을 합치면서 금양의 “양”자를 따서 지금의 “곤양”이 되었다. 따라서 “곤양”이 되었다. 따라서 풍수지리의 측면에서 지명을 보자면 곤양보다는 곤명이라는 지명을 뜻풀이 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곤(昆)'은 맏이를 의미하며, '명(明)'은 일월성신(日月星辰)의 기운이 모인 힘찬 밝음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곤양은 조선초기부터 경제·군사적 요충지였고, 풍수지리에서 볼 때 왕성한 지기로 말미암아 제왕이 출몰할 지역으로 알려지고 있다.

-가화리
-검정리
-남문외리 : 남문, 옥곡
-대진리 : 석문, 제민, 한월
-맥사리
-무고리 : 무고, 상평
-묵곡리 : 목단, 묵실, 동천
-서정리 : 상정, 후전, 사동, 우티
-성내리 : 삼동, 수동
-송전리 : 송정, 당천, 포곡
-중항리 : 와티, 점복, 안도
-환덕리 : 환덕, 본촌, 고동포
-흥사리


<자료출처:사천지명지>

 

Copyright (c) 1999 사천신문 Co.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