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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의 역사와 유적지를 찾아서(58) 일제강점기 조선인 노동자들이 수장된 탄광 사고 』

  우리는 다시 기억해야만 한다.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수장된 탄광 사고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는 일본 야마구치(山口)의 탄광에서 1942년 2월 3일 오전 10시 채탄 작업에 투입된 탄광부 183명(재일조선인 노동자 130여 명 포함)이 갱내 침수로 인해 사망한 대형 탄광 사고이다. 희생자 중 136명(또는 137명)이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된 조선인 징용자들이었으며, 이들을 감독하고 관리하던 일본인 47명도 함께 수장된 참극이었다. 희생자는 오늘날까지도 수몰된 갱도에 수장된 채로 유골조차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
1939년부터 조세이(ちょうせい)탄광에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되기 시작하였다. 탄광의 조선인 노동자 동원 계획 수는 1939년에 450명, 1940년 800명, 1941년 380명 등 총 1630명이었고, 실제 동원된 인원은 1941년 기준 1,258명으로 우베 탄전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기록하였다.
조세이 탄광의 규모를 감안할 때 노동력 가운데 조선인 비율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현지에서 조세이 탄광을 ‘조선 탄광’이라고 부를 정도로 조선인 채탄부 비율이 높았다. 그 이유는 노동 조건이 가혹하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어서 이전부터 많은 탈출자가 속출하였고, 탈출자의 입을 통해 탄광의 실태가 널리 알려져 일본인들이 꺼리는 탄광이 되었기 때문이다.
회사 문서에 의하면, 1,258명의 조선인 노무자들은 1939년 10월 12일부터 1941년 10월까지 14차례로 나뉘어 동원되었다. 경상북도 군위군과 영덕군·영천군, 경상남도 사천군과 고성군, 충청남도 당진군 출신의 조선인이 동원되었다. 이들 지역은 1938년과 1939년에 한발의 피해가 극심한 지역이었으므로 조선 총독부가 할당 지역을 선정할 때 반영한 것으로 판단된다. 가장 많은 수는 1939년 10월 12일에 탄광에 도착한 249명이고, 가장 적은 수는 1941년 4월 13일에 동원된 16명이다.
그중엔 경남출신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구. 사천군과 고성군에서 집중적으로 강제 징용됐다. 현재까지 확인된 명단에는 조세이 탄광에 도착한 날을 기점으로 1940년 5월 10일 31명(출신지 미기재), 1940년 9월21일 72명(사천군, 고성군), 10월 17일 82명(사천군, 고성군), 10월 30일 46명(사천군, 고성군), 11월 30일 49명 (출신지 미기재), 12월 20일 42명 (출신지 미기재)이 강제 연행된 것으로 나타났다. 희생된 136명의 조선인의 출신지는 경남 34명, 경북 60명, 전남 4명, 충남 9명 등으로 확인되고 있다.
사천시 곤양면 중항리 출신 목격자 최수조(崔壽祚)씨의 증언
『곤양면 중항리의 최수조(崔壽祚)씨는 50년 전 악몽을 되씹으면서 생각하기조차 싫은 체험ㆍ목격담을 말했다. 최씨가 징용된 것은 19세 때인 1939년 이웃마을 친구인 신삼윤(당시 20세)과 함께였다.
곤양과 서포면 등지에서 온 징집자들과 진주역에 집결하여 열차로 부산으로 간 후 이틀 만에 시모노세끼(下關)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다시 배치된 곳이 시모노세끼(下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생탄광이었다.
채탄 광부는 360명으로 180명씩 2교대로 일을 하였다. 새벽 4시부터 하오 4시까지, 하오4시부터 다음 날 새벽4시까지 꼬박 12시간을 채탄하여야 하는 고된 중노동이었다. 혹서와 혹한이 교차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버티었다. 손발이 부르트고 피로에 지쳐 쓰러진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광부는 한국인을 비롯하여 중국인 일본인들도 다수 있었다. 사고는 탄광에 배치된 지 10개월이 지난 1940년 6월 어느 날 새벽이었다.
동향인 신씨와 근무교대를 하고 최씨는 막사에 잠깐 쉬고 있었다. 갑자기 꽈앙하는 폭음과 함께 광부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바다 밑으로 통하여 있는 갱도가 물의 압력을 받아 누수현상을 보이다가 구멍이 커지면서 갱도 안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와 함몰된 것이었다. 전기와 공기공급이 중단된 암흑천지의 갱내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지경이었다. 그러나 구조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갱도는 물, 석탄, 돌멩이들로 가득 차 붕괴되었다. 순식간에 180명 전원이 몰살(沒殺)되었다. 이 중 130명은 한국사람 이었다. 일제는 뒤늦게 복구 작업을 착수(着手)하였지만, 장비부족을 이유로 중단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전쟁은 끝나고 일본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지만, 사고규명은 물론 억울한 죽음들에 대하여 아무런 위로의 조처조차 하지 않았다. 사고 직후 최씨는 탄광을 탈출하여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군무원으로 행세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1944년 귀국선에 오를 수 있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연료인 석탄 증산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부족한 노동력은 조선에서 끌고 온 조선인으로 충당됐다. 조세이탄광은 현지 일본인들이 ‘조선탄광’이라고 불릴 정도로 조선인들이 많았다. 돈을 벌수 있다는 꾐에 빠져 가족과 함께 이주한 조선인도 있었지만, 1939년부터 강제로 징용되기 시작하면서 400여 명이 넘는 조선인들이 혹독한 강제노역을 당했다. 탄광 측은 사고재발 위험이 높다는 이유로 시신 발굴도 하지 않은 채, 1945년 패전과 동시에 폐광하였다.
죠세이 탄광 수몰사고는 1941년 12월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된 태평양전쟁 2개월 만에 터진 대형 참사로 제국주의 일본은 국민적 사기저하를 우려하여 철저하게 은폐, 통제함으로서 이 사고는 세상에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수몰사고에 대해 양심적인 우베 시민들이 나서 조사연구를 시작하면서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 우베시의 니시카와 해변의 추모비를 둘러싸고 있는 담장에는 한국어로 새겨 놓은 글귀가 적혀 있다. …조선인 희생자와 그 유족에게는 일본인으로서 진심으로 사과의 마음을 올립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비극을 낳은 일본의 역사를 반성하고, 다시는 다른 민족을 짓밟는 포악한 권력의 출현을 용납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여기에 희생자의 이름을 새깁니다. - 2013년 2월2일, 조세이 탄광의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모임
참고문헌 : 곤양향토사, 일본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 진상 조사(2007), 경남일보, 강호광의 진주근현대사

문화부장 김진식
kimarami2005@naver.com

2021년 07월 22일 9시 56분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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