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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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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의 역사와 유적지를 찾아서(63) 팔장포(八場浦)에 세워진 에히메촌(愛媛村)Ⅰ

  일본이 서구 열강들에게 배운 문물과 제국주의화는 조선의 산업, 특히 어업분야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조일무역규칙(朝日貿易規則,1876),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1883), 조일통어장정(朝日通漁章程,1889)과 한일어업협정(韓日漁業協定,1908)의 체결은 일본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우리의 뜻과 이익과는 전혀 맞지 않고 일본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조약이라 하겠다.
어업침략과 수탈의 과정에서 한국해의 보조이주어촌의 형성은 식민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으로 적극적이고 계획적인 방법으로 추진되었다. 그리고 일본정부의 지원 정책 중 중요한 것은 원양어업장려정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가 공식적으로 해외 출어를 조장한 최초의 정책이기 때문이다.
1904년 한·일어업조약이 개정되어 통어구역이 한국전역에 확대되었다. 1904∼1905년의 러·일 전쟁은 도리어 이 해역의 소비시장을 증대시켜 인천어시장에 올라온 우마군(宇摩郡) 후타나촌(二名村) 어민은 막대한 이익을 올렸다. 이와같은 여건 속에서 1905년 “원양어업장려보조규칙”을 제정하고 「한국 및 그 부근의 연해 출어의 목적으로 조직한 신용조합 또는 본청의 인가를 얻은 동맹, 기타의 조합에는 본 규정에 의하여 보조금을 지급」하였다.
이 보조의 방침에는 각지에 신용조합 또는 출어조합을 결성하여 그 통괄로서 “에히메현 원해출어 단체 연합회(1906년 설립)”가 설립되고 그 결과 1904년은 어선수 172척, 통어자 873명이었던 것이 다음 해에는 200척, 1,004명으로 급증하였고 더욱이 1912년에는 통어선 307척, 통어자가 1,599명에 이르게 되었다. 1905년 미사귀촌의 경우 어선 62척, 260명, 후타나촌은 45척, 205명, 우오시마는 20척, 177명이 출어하였고, 1914년에는 우오시마가 77척, 660명, 미사귀촌이 31척, 215명, 후타나촌이 30척, 150명이 출어하여 에히메현의 조선해 출어 3대 어촌으로 부각되었던 것이다.
1906년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일본 어민들이 조선 연해의 어업을 장악하기 위해 취한 어업정책을 살펴보면, 일본정부는 1898년 원양어업장려법을 공포하면서 일본 어민의 조선 연해 진출을 적극적으로 장려해갔다. 그러나 일본 어민이 성어기에 조선 연해를 통어하면서 이익을 얻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 정부는 일본 어민의 조선 이주를 계획하였다. 통감부는 일본 어민의 조선 이주를 조직적으로 장려하기 위해 일본 정부와 협력하면서 적극적 어업정책을 실시해갔다. 먼저 조선 연해에 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에히메현사에는 조선해 통어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한국수역에는 1878년∼1886년에 출어하여, 1890년 1월에는 “양국통어규칙”이 맺어져 멸치(霧)를 주로하여 도미(釋)나 고등어(鯖), 삼치(娥) 등을 예망(曳網)· 유망(流網)· 연승(延唎) 등으로 잡았다. 조선반도 남안의 거제도, 절영도, 마산포 등이 주요 어장이다.
에히메촌은 성공을 거둔 소수의 보조이주어촌으로 남해안의 경상남도 사천군 삼천포면 동금리 팔장포(八場浦)로 후에는 향촌리(香村里)까지 확장되었는데 이 장소가 이주어촌의 건설지로서 선정된 것은, 에히메촌의 지도자 야마모토 모모기치(山本桃吉)가 1905년부터의 통어 중, 주변 해역이 남한 굴지의 고등어 어장이라는 사실에 착목하여 선정한 것이다.
1909, 1910년도의 현비보조(1호당 건물 7할, 토지 3할 보조)에 의해 24호를 건설하고, 다음 해에는 24호, 가족의 93인이 들어왔다. 고등어 건착망을 전호가 균등하게 출자하여 경영을 하였다. 수익은 우선 공동 용지의 확보, 개인적으로는 논밭의 구입에 돌려졌다. 그 결과 개인 소유의 논밭은 10㏊ 이상에 달하여 그 일부는 현지 소작인에 위탁되었다.
신규로 들어오는 자가 늘어나 1921년에는 37호와 향리 미나미우와군(南宇和郡)으로부터의 통어자를 포함하여 고등어 건착망 3통으로 조업하였다. 당시는 계속 풍어가 되어 연간 어획량은 2천톤 이상에 이르렀다. 어획물은 고치(高知)의 상인과 계약하여 시모노세키(下關) 방면에 피스톤으로 수송되었다. 이 에히메촌이 발전한 것은 풍어기였던 사실도 있지만, 철저한 공동경영과 우선 식량을 확보하는 반농반어촌의 건설에 성공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남해안의 고등어 어획의 감소로, 고등어 어군을 쫓아서 봄·가을 동해안의 영일만 방면에 출어하여, 포항을 기지로 하여 조업하였다. 바로 이 출가(出稼) 중, 1923년 4월 12일의 태풍으로, 에히메촌의 3통을 비롯하여 40통의 고등어 어선이 괴멸적인 타격을 받아, 에히메촌 관계자만도 30인 이상의 조난자를 내었다.
망(網)은 복구하였으나 그 후 고등어의 어획은 부진하여 에히메촌은 어촌으로의 생체를 잃게 되었다. 미나미우와군(南宇和郡) 니시우미정(西海町) 우치도마리(內伯)에는 「조선영일만조난자초혼비」가 세워져, 그 뒤쪽 비문에는 “자성온건(資性溫建)하여 앞서 나아가 국부의 증진을 꾀할려고 하여, 조선영일만에 출어중, 우연히 태풍에 접하여 불귀의 객이 되었다. 아 아 슬프도다”라고 적어 34인의 조난자의 성명을 새기고 있다.
「경상남도의 이주어촌」이라는 책에서는 에히메촌에 대하여 “현금 기초가 공고한 점에서 통영군 오카야마촌과 함께 모범이주어촌이라 일컬어진다”는 평가 아래, “야마모토 모모치기”가 중심이 되어 이주어업단을 조직하여 1912년 3월 12호, 같은 해 12월 12호를 건설한 바, 1918년 5월에 이르러 다시 10호를 더하였다“고 어촌 형성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요시다(吉田)는 에히메촌의 형성과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교적 소상하게 언급하고 있다.
「경남 사천군 삼천포면 동경리(東鏡里 : 동금리(東錦里)의 착오 오식) 팔장포에 1908년경 에히메현민의 임의 이주가 있었다. 1912년 미나미우와군 니소토우미촌 오아자(大字) 우티도마리(內伯)의 야마모토 모모기치(山本桃吉)가 통어로 내포하였을 때, 이주어촌건설지로서의 우수성을 인정하여, 이곳을 동현 원양어업이주어촌 후보지로 선정하고, 그 경영을 현 및 동현 원해출어단 연합회에 자문하여, 현비의 보조를 받아(이주자 1호당 건물 7할, 토지는 3할 보조), 다음 해 3월 우치도마리 어민 12호와 더불어 내주하여 여기에 에히메촌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야마모토 모모기치씨의 이주어촌경영의 근본방침은 반농반어였다. 이는 씨가 향리에서 어촌경영의 실제 경험에 기초한 것으로, 바꾸어 말하면, 난요(南豫) 우치도마리 어촌 경영의 조선에의 발전적 연장이었다. 부근은 남선 굴지의 고등어 어장이므로 전 어민을 조합원으로 하는 고등어 건착을 경영하여, 1주(株) 2백 엔을 평등하게 분담하는 공동경영으로, 자본주 즉 어업자였다. 이 경영방식이 본 어촌발전의 요인이 되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또, 사업 확장 자금 기타는 야마가미조(山神組)에서 도입하였지만 경영이 좋아, 1921년 말에는 호수 37호, 건착망 3통, 어선 15척, 경영자수 34명, 연생산량 560만관(2,250톤)에 달하여, 당시 조선내의 이주어촌 중 1인당 평균 최고의 이윤을 올렸다.
따라서, 어기(漁期)에는 수백 척의 운반선이 출입하여, 이리사촌과 함께 남선 굴지의 고등어 어업 근거지가 되어 한 때 파시(波市) 경기가 들끓었다. 고등어 수익으로 널리 토지를 구입하여 촌 전체가 반 농반어적 경영으로 나아갔다. 또 공동구입의 토지 이외에 개인 소유의 논밭 수십 정보가 있으며, 이는 오로지 조선인의 소작 경영에 부쳐졌다. 마치 오카야마촌과 마찬가지 길을 걸어, 이주어촌 경영상 중대한 문제를 던졌다.
그 당시 어촌은 삼천포면에 접속하여 있으므로 교육·위생·교통·물자구입·어획물의 처리 등에 지극히 편리하며, 또한 입지조건이 발전의 원인이었다. 이러한 성공의 뒤에는 실로 야마모토 모모기치((山本桃吉)의 좋은 지도의 결과였다. 씨의 송덕비에 “비에 젖고 햇볕에 쬐여 그을려, 만신 철과 같다”고 쓰고 있는데, 그의 전모를 잘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에히메현의 이주어촌 경영, 삼천포의 에히메현의 이주어촌 경영과 삼천포의 에히메촌의 형성에 대한 과정을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1908년의 한·일어업협약의 체결 이후, 일본인에게 어업권이 인정되고, 이주어업에 대한 보호가 두터 웠으며 고등어 자원이 바다에 넘칠 정도로 많은 사실에 유인되어 이주어촌 건설에 착수하여 한·일합병과 더불어 집단이주를 하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특히 에히메촌의 지도자 야마모토 모모기치((山本桃吉)의 어촌 경영방식(고등어 건착망 공동 경영과 반농반어촌 경영)에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어서, 1911년 5월에는 우치도마리(內伯)의 산본도길을 단장으로 고등어 잡이를 목적으로 삼천포에 공동 이주하여 왔는데 당시는 우치도마리에서 조선 삼천포까지는 7일간의 항해였는데 시모노세끼(下關)에서 날씨를 살펴서 곧장 대마도를 향해 대마도의 고토(琴) 또는 기타다우라(北田浦)에 들러 만력(萬力)의 세토(대마해협)를 빠져 나와 삼천포까지 돛과 노를 저어 건넜다 한다.(다음편에 계속)

참고 문헌 : 통감부의 어업 이민 장려와 어업법 제정, 이영학, 경상남도의 이주어촌, 일제의 조선어업 지배와 이주어촌 형성(보고사 2000년), 여박동(呂朴東) 교수

문화부장 김진식
kimarami2005@naver.com

2021년 09월 09일 10시 25분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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