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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산봉수(角山烽燧 경상남도 지정 문화재 자료 제96호)
봉수(烽火)라
함은 산 위에다 일정한 장소를 정하여 횃불 올리는 것을 말하며, 고대 통신 방법의 하나로 인편에 의한 방법 외에 높은
산에 올라가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법으로 정하여 실시한 시기는 고려 의종 3년(1149)부터라
한다.
방법은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으로 하되 평상시에는 한 번 올리고 2급(急)시는
두 번, 3급시는 세 번, 4급시는 네 번씩 올렸다. 조선에서는 세종 때 정식으로 봉수제도를 마련하였는데 평시에는 횃불을 1개,
적이 나타나면 2개,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3개, 국경을 넘어오면 4개, 접전을 하면 5개를 올렸다. 만약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불어서 연락이 불가할 때에는 봉졸(烽卒)이 차례로 달려서 보고하였다.
각 봉수대의 인원은 연해(沿海)와 변경지방은 군사 10명, 오장(伍將) 2명씩
두었는데 이들은 봉화대(烽火臺) 근처에 사는 자라야 했다. 그리고 봉화대에 배치되는 봉군은 다른 군역에 종사할 수 없으며 오직
망보는 일에만 종사하게 했다.
봉화대는 표주(標柱)를 세워 경계를 설정하고 무당이나 토속신앙에 의한 잡신제사를
일체 금했다. 당시 봉수망의 종점은 서울 남산에 있었으며 간선(幹線)을 직봉(直烽)이라 하고 보조선을 간봉(間烽)이라 했다.
그런데
이 봉화를 옛날에는 승냥이의 똥으로 태웠다고 하는데 승냥이 똥에는 인(燐)이 많이 섞여 있어서 불빛이 푸르고 밤에는
더욱 멀리 보이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기나 기상관계로 봉화를 올릴 수 없을 때는 봉졸이 직접 뛰어가서
전하기도 하였다.
대방동 산 2번지 각산의 정상인 해발 398m의 봉고지에 있다. 1983년 12월
20일 도지정문화재 자료 제96호로 지정되었다.
이 봉수는 고려 때 설치된 간봉이며 남해의 금산에 있는 구정봉의 연락을 창선면
태방산을 거쳐서 받았으며 이를다시 고려 때는 용현면의 침지봉수(용현면 신복리와 석계리를 잇는 동쪽 뒷산에 위치)와 곤양면의 우산봉수(곤양면
남문외리와 서포면 외구리의 경계를 이룬 남산에 위치)로 보냈다.
조선시대 세종 때 봉수망의 정비로 침지봉수와 서낭당봉수(정동면 예수리 서낭산성에
위치)를 폐지하고 다시 용현면의 안점봉수(사남면 화전리와 용현면 신복리의 경계인 지금의 봉대산에 위치)를 설치하여 안점봉수로
연락하였다. 또 한편으로 사량도의 공수산봉수를 고성의 좌이산봉수에 전달하는 역할도 했다.
<자료출처:향토문화유적>
각산봉수
침지봉수 성황당봉수
안점봉수 우산봉수 ※봉수제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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