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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11.01 09:04

상사(相思)바위

본촌리는 곤명의 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이름이 곤명 또는 본촌이라고 하는데, 고려 왕건 태조 때 곤명현이 설치되면서 관아의 소재지가 이곳이었기에 오늘까지도 곤명과 본촌으로 함께 불리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큰 마을이 무당골이고 동너머에는 서재골 윗쪽에 한 평 남짓한 평평한 바위가 있으니,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고 하는데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무당골에 가세가 넉넉한 무녀(巫女)가 살았는데 무남독녀의 외동딸이 있었다. 그녀는 총명한데다 용모도 잘 생겨 이름을 "예쁜이"라 하였다. 어느덧 18세의 아리따운 아가씨가 되어 서재 학동들이 눈독을 올렸으나 신분의 차로 부모의 엄한 훈계가 따르므로 관심 밖으로 눈여겨보지 않아 동네 사람들은 무녀의 몸에서 태어난 것을 아까워하였다. 무당골 밑에 양달 마을이 있는데 장부자가 살았고 그의 아들 장도령은 같은 나이 또래로서 이 집의 귀한 독신 아들이다. 재산 있는 명문 귀공자로서 글공부도 잘하여 전도에 촉망이 컸다. 장도령이 다니는 서당길은 언제나 무당골을 지나야 하는데 사춘기에 든 예쁜이는 날마다 집 앞을 지나는 이 미소년인 장도령에게 어느덧 마음으로 짝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도령은 양반에다가 부자집 외아들이니 언감 생심 천인(賤人)으로 하대받는 무당의 딸하고는 혼인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한편 예쁜이는 사모하는 정이 날이 갈수록 더하며 글방에서 돌아가는 장도령에게 다가서서 사랑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평소 마음에도 없는 무당 딸이었기에 장도령은 이 애절한 구애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거절하며 지나가 버렸다. 이날부터 예쁜이는 상사병에 걸려 크게 앓다가 며칠 뒤 가슴에 한을 안은 채 장도령을 부르면서 숨을 거두었다.

예쁜이가 죽은 수일 후 장도령은 잠결에 몸이 써늘하고 압박감을 느껴 눈을 떠보니 이것이 어찌된 일이냐. 큰 뱀이 자신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기절 초풍할 정도로 놀라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부모와 가인이 달려와 보니 무시무시한 눈앞의 현실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예쁜이는 죽어서도 장도령을 못 잊어 뱀으로 화(化)하여 사랑하는 애인을 찾아 포옹하는 것이었다. 가인들이 달려들어 떼려하니 분노에 찬 뱀의 눈에 소름이 끼치고 손을 대면 댈수록 더 조여지는 것이었다. 장도령이 하는 수 없이 뱀의 몸둥이를 쓰다듬어 주니 몸을 풀어주기는 하지만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장부자는 아들을 구하려고 부적을 붙이고 독경을 하고 굿을 하는 등 온갖 방법을 다했으나 뱀을 뗄 길이 없었다. 장도령은 그날부터 서당에도 못 가고 친구가 와도 만날 수 없고 방에 갇혀있는 신세였다. 하루는 답답함을 못 이겨 학우들과 자주 놀았던 서당 윗쪽 덕천강 위에 자리한 넓은 바위로 나갔다. 장도령은 예쁜이가 죽어서까지 사랑을 못 잊어 이러는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안정되고 흉물스럽지 않으며 몸이 따스함을 느꼈다. 이승에서 어차피 못살 바엔 저승에 가서 너의 사랑을 받아 주겠노라하며 백 척이 넘는 높은 벼랑에서 몸을 날려 깊은 물 속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뒤 후세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 부르게 되었고 벼랑 밑 깊은 물은 '용소'라 하여 지금도 두려운 검푸른 물이 소용돌이치며 흐르니 사람들은 아예 접근을 하지 않고 있다. 독신아들이 죽은 장부자집은 흔적 없이 망해버렸고, 오늘까지 이 동네 이름을 "장자터"라하며 옛이름 양달을 따서 양월(陽月)로 부르고 있다.

<자료출처:곤명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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