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신문 | 봉화대(생활광고) | 사이버사천
2022. 11.28 00:39

화전리(花田里)

◆본래 사천군 근남면의 지역으로서 화전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도동동, 병둔동, 예의동, 구룡동을 병합하여 화전리라 해서 읍서(사남)면에 편입됨.

◆각골 : 병둔 옆에 있는 골짜기.

◆고래실 : 각골 옆에 있는 골짜기.

◆공적비 : 진정자 옆에 있음. 원진보 진영재 공적비.

◆구룡 : 화전 동남쪽에 있는 마을.

◆구룡사(九龍寺) : 일명 귀룡사(歸龍寺), 기룡사(起龍寺)라고도 한다. 남방 불교의 사찰이 있던 곳으로서 지금은 없어지고 다시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는데, 고려 명종 13년 3월에 보림국사가 중창하고 기룡암이라 하였다. 그 후 기룡암은 페허가 되고 다시 복원하여 구룡사로 명명하고 선방(禪房)으로 많은 스님들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

◆구룡재(九龍齋) : 구룡 김해 김씨 재실임.

◆꺼골재 : 각골재에서 고래실로 넘어가는 고개.

◆누룩바위 : 구룡마을에서 구룡사로 가는 길에 보면 보인다. 바위가 누룩까지 생겨 층층히 쌓여있는 바위.

◆도동(道東) : 진삼국도 동쪽으로 접하였다하여 도동으로 명칭하였다.

◆독뫼등 : 화전 서쪽에 있는 골짜기.

◆딱밭골 : 구룡 남쪽에 있는 골짜기. 탁나무가 많이 있었다 함.

◆발랑고개 : 산제당 밑에 있는 고개.

◆방아골 : 구룡마을 앞에 있는 골짜기.

◆배정자 : 도동마을 남쪽 죽천변에 팽나무 수령 약 560년된 보호수가 있었으나 바람에 가지가 부러지고 고사하여 지금은 느티나무를 심어서 보호하고 있다. 마을에서는 이 팽나무에 동신제를 모시고 있었고, 구전에 의하면 고목나무에서 피가 나면 나라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전하고 있으며, 봄철에 일시에 잎이 필 때와 부분적으로 피는 것을 보고 그 해의 농사를 점치기도 했다한다.

◆백화산 : 화전 남쪽에 있는 산.

◆병둔(兵屯) : 임진왜란 때 선진리성 싸움에 정기룡 장군의 부대가 주둔하였다고 붙여진 지명이라 한다. 일제 때 경남지사를 지낸 하시모리시다은 당시 왜군에 끌려간 하씨(河)의 후손이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지사로 부임한 후 곧바로 초도순시라는 명목으로 병둔 마을을 찾아가서 집집마다 방문하여 인사를 하였다 한다. 알고 보니 임란 시 왜군에 끌려간 하씨의 후손으로서 선조의 유거지를 탐방한 것이다.

◆불당골 : 구룡사를 들어가는 골짜기. 옛날에 절이 많이 있었다 함.

◆사상재(泗上齋) : 병둔 마을 남쪽에 있는 진양 하씨의 재실이다.

◆상투바우 : 사람의 상투같이 생겼다 하여 이름함. 구룡마을 남쪽에 있는 바위.

◆서지굼터 : 화전 서쪽에 있는 서재터.

◆선달바우 : 화전 동쪽에 있는 바위.

◆수도원지 : 구룡절골에 있는 수원지.

◆신바위 : 병둔 웃마을에 서 있는 남자의 신바위라 함.

◆신방골 : 화전 마을 동남쪽 강 건너 산골.

◆오정자 : 화전 동쪽에 제방과 풍치림으로 조성하였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들판임.

◆옥녀세족설 : 화전 서남쪽에 있는 산.

◆입석(초전)과 여근곡(女根谷) : 사남면 화전리 죽천천 건너 봉태산 북쪽에 여근곡이 있는데 맞은편 500m들을 지나면 병둔 마을이 있다. 이 마을 뒤에 선돌(立石)이 하나 밭 가운데 우뚝 서있다. 예부터 여근곡이 있는 곳은 음기(陰氣)가 강하여 자식이 귀하고 부녀자의 치정(癡情)이 끊이지 않기 때문에 선돌을 세워 음기를 누르려는 뜻에서 마주보는 곳에 선돌을 세워 방지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다. 예) 함양읍 용평리에는 선돌이 서 있는데 이은리 남산마을 입구에 여근암(女根岩)이 우뚝 서있다.

◆자시들 : 화전 북쪽 마을 앞들.

◆진정자(陳亭子) : 화전 마을 동쪽 도로변에 있는 정자나무를 진재영씨가 1933년에 진분계 숲에 묘목 2개를 가지고 와서 심었는데 1개는 고사하고 현재 1그루만 살아남아 운치 좋고 하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함.

◆질골 : 신바위 건너 강 건너 산골짜기. 음곡.

◆풀동바우 : 화전 앞에 있는 바위. 이곳에 풀을 쌓았다 함.

◆화전(花田) : 꽃밭이란 뜻인데 옛날에는 거의 들판이 천수답이던 이유로 물 빠짐이 좋은 자갈흙으로 되어 있어서 밭으로 사용되었던 관계로 목화와 메밀을 심어 온 들판이 하얗게 꽃을 피워 꽃밭 같다는 뜻, 또한 곶(串)은 불쑥 튀어 나간 부분을 가리키는데, 이러한 곶이 안쪽은 곶안이라 한다. 그러나 이것을 바다나 강가에 여러 곳에 많은 땅 이름을 들 수 있다. 이것의 상대지명의 곶밧인데 꽃밭으로 옮겨지면서 한자로 고잔(古棧)으로 옮겨져서 바닷가나 강가에 여러 곳에 많은 땅 이름을 들 수 있다. 이것의 상대지명이 곳밧인데 꽃밭으로 옮겨지면서 한자로 화전(花田)이 되어 해안이나 물가에 이 이름이 붙은 지명이다 따라서 고잔과 꽃밭은 곶은 중심으로 한 상대적인 땅 이름인데 각각 한자로 고잔(古棧)과 화전(花田)으로 되어 한자표 과정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러한 연관이 있음을 알기가 어렵다. 곶의 바깥쪽(串外)이란 뜻인 곶밭이 꽃밭이 되면서 화전(花田)이란 한자지명으로 된 곳이다.

◆효자덤 바우 : 화전 앞산 먼당에 있는 바위.

◆효자문(孝子門)
사남면 월성리 진삼국도변에 초라한 비각이 하나 있다. 옛날 사남면 예의동에 있는 은순(殷順)이란 효자가 살았는데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그의 아버지가 죽자 밤낮으로 슬피 울며 집안이 가난하여 장사를 못 지냄을 한탄하고 있었는데 마을에 불이 일어났다. 그때가 농사철이라 어른들은 들판에 모두 일하러 나가 없었고 아낙네들만 우왕좌왕하면서 불을 끄려 하였으나 불길은 잡히지 않고 더욱더 마을에 번져 은순의 집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가난하여 장사를 못 치르는 것도 한인데 화재마저 일어나 아버지의 시신을 불태울 것을 생각하니 안타까워 마당에 나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여 대성통곡하였다. 하늘이 그 효성에 감동하였는지 뜻밖에도 소낙비가 쏟아져서 불을 끄게 되었다. 장사를 치룬 은순은 죽을 끓여 먹으면서도 시묘(侍墓)를 알뜰히 하였다. 뒷날 사람들이 이 효자의 지성에 감동하여 효자문을 세우게 되었고, 지금 남아 있는 효자문은 정조 10년(1786)에 중건한 기록이 비문에 새겨져 있다.



<자료출처:사천지명지>

화전리
 

Copyright (c) 1999 사천신문 Co.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