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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9.21 01:22

풍정리(豊井里)-풍정

◆풍정 : 주역에서 풍정의 풍(豊)은 크다(大)라는 새김으로, 정(井)은 기르다(養)는 뜻이라고 한다. 곧 크게 길러내는데 다함이 없다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또 예(禮)의 고자(古字)로, 매우 많아서 넉넉한 풍년이라는 뜻의 풍(豊)이고, 정은 지혈출수의 우물 정(井)자로서 신풍(新豊), 상정(上井)에서 따온 지명이다. 다시 말하면 수원이 풍부한 우물이 있는 마을이라 풀이한다. 그런데 신풍동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지금의 풍정(豊井)과 음운이 똑같은 풍정(風亭)이란 지명이 나온다. 한데 음이 같은 풍정이란 이름은 어디에서 따온 것일까? 향토사적으로 사천고을의 옛 읍기가 지금은 없어진 옥산 부근에 있을 때에, 당시 향교의 기지 또한 지금의 풍정에 있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조선 세종대에 이르러 사천읍성이 축성되어 읍기를 옮겼는데 이 무렵 향교도 이건되었다고 한다. 그것은 사천향교의 연혁사를 보아도 미루어 알 수 있다. 향교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에 계승된 전국 각 고을마다 1교식의 교육기관으로서 많은 인재를 길러낸 곳이며 이를 교궁·재궁이라고 일컬었다. 뿐만 아니라 대개의 향교는 전학후묘형이라 하여 문묘라고 도 하는데 많은 건물 가운데 하나가 풍화루(風化樓)이다. 풍화루는 향교에 회삼문을 들어서면 맨 앞에 위치하는데 이는 유화지도(儒化之道) 이를테면 교육이나 유풍의 힘으로 풍속 또는 향풍을 순화화고 잘 교화시키는 다락이란 뜻이다. 때문에 향교가 풍정에 소재할 당시 풍화루의 풍(風)과 누정의 정(亭)자를 따서 '풍정(風亭)'이라 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풍정이 신풍동(新豊洞)으로 개칭되고 1914년 신풍동의 풍(豊)자와 상정동의 정(井)자를 적취하여 오늘의 풍정(風井)이 된 것이다.

◆갯돌 : 풍정 웃말 어귀에 있었던 바위. 마을의 지세가 범형국이라 해서 바위를 개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곧 개는 범의 먹이가 되기 때문에 마을이 가멸(살림이 넉넉해진다는)해 진다는 뜻에서 마을 입구 좌측에 세웠는데 수년 전에 도난 당하였다.

◆거문골 : 풍정 북쪽에 있는 골짜기.

◆당산 : 풍정 남쪽 대로변에 있는 산으로 완만하게 동서로 향해 가로 누어 있다.

◆동잡동 : 풍정 동북쪽 장지골 막바지에 있는 마을로 앞의 못을 막아 골이 험하게 되어 인가가 없어졌다 함.

◆동삿골 : 장지골의 입구에 있는 골짜기.

◆메팀이골 : 장지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메만한 금붙이가 나왔다 함.

◆백갈둠벙 : 풍정 앞에 있는 둠벙. 큰 웅덩이를 파서 그 물로 농사를 지었는데 경지정리로 없어짐.

◆부봉산(浮蜂山) : 아늑하고 평화로운 풍정 아랫말 뒤에는 부봉산(201m)이 한일자로 가로누워있다. 보는 방향에 따라 여러 형상을 지니는 이 산은 사천·진주·고성의 세 고을을 가르는 봉대산의 줄기가 서북향으로 치달아 종립한 산으로 사천읍지에는 지리산의 내맥이라 기록돼 있다. 이 산에 올라 주위를 바라보면 사천일원은 물론이거니와 멀리 남해와 하동, 그리고 진주시도 한눈에 들어온다. -《사천읍지》 산천조를 보면, 이 산의 옛 이름이 두음벌산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벌이 나는 형상이라 하여 부봉산이지만 옛적에는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그러면 '두엄벌'이란 무슨 뜻을 갖는 것일까? 어느 국문학자의 말을 빌리면 '두음(豆音)'과 '벌(伐)'로 합성된 이 말은 음운학상으로 볼 때에 우리나라의 고대어로서 즉 이두라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신라시대 이후 한문 글자의 음과 새김을 풀어서 한문을 우리말식으로 적어 쓰던 맞춤법인데 여기서 '둠'의 새김은 둥글다라는 원(圓)과 사위(四圍) 즉 사주(四周)라는 뜻이고, '벌(伐)'은 친다는 뜻과 함께 벌(閥)과 동의어로 어떤 세력이나 집단의 뜻이라고 한다. 때문에 한자는 '두음(豆音)' 또는 '두무(豆無)' 그리고 '벌(伐)'로써 표현되는데 한 지역을 수호(守護), 진안(鎭安)하는 군대나 우두머리를 두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이로써 볼 때 조선 초기의 사천진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오늘날에도 이산을 일컬어 '떰불' 또는 '뚬벌산'이라 하는데 이는 '두음벌'의 방언으로서 아직 옛 산명이 살아 있음을 말해 준다.

◆북싯골 : 풍정 아랫말 북쪽 부봉산 산자락에 있는 골짜기. 일명 수북동 또는 북수동이라고도 일컬었으며 사천강 북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서짓골(서재골 書齋谷) 풍정마을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옛날에 서당이 있었다 하여 서짓골이다. 이 나라 삼천리 방방곡곡이 다 그러했듯이 근대적 교육기관인 학교교육이 있기 이전에는 각 고을의 마을마다 한문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었다. 그런데 이 서당이 언제 없어졌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 풍정부락에는 서당말고도 한문사숙이 있었다. 고종 대는 한학자로 이요헌 최덕묵이라는 분이 축서설하여 후생들 수학에 힘을 기울여 왔고, 또 한말 때는 간재 전우선생의 문인이던 춘암 최효습이 대양재에 소거하여 후진양성과 유도진흥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정우에는 그를 기리는 기적비가 서 있다.

◆옥산(玉山) : 풍정마을 입구 대로변 남쪽에 조그맣게 생긴 옥산이 있었다. 주산이던 부봉산의 한 줄기가 서남으로 흘러 내려 동쪽에는 소타물산, 서쪽에는 남라등이 자리잡았다. 또 남라등의 뫼뿌리가 동남으로 휘돌아 몽실하게 솟아오른 것이 옥산이다. - 기록에 의하면, 옥산에는 수느리대가 많이 나 활대로 쓰여졌을 뿐 아니라 토산품으로 공납하였다고 씌여 있다. 또한 구전에는 태고적 창출될 당시의 전설과 이외에 산 위에 장군수라는 우물이 있어 보통사람은 먹을 수가 없었으며 장수들만 오르내리며 물을 마셨다는 병마사의 사천진과 무관하지 않음을 말해 준다. 이같이 음양조화로서 사람들의 신앙대상인 옥산을 이제는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현대판 우공이산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즉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10여년 동안 처음에는 사천비행장 확장공사에 따르는 취토 및 채석장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각종 건설공사에 쓰이는 골재를 본격 생산함으로써 모름지기 산은 사라지고 말았다. 때문에 옥산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다만 기록에서나 볼 수 있는 이름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일석이조라는 말처럼 없어진 빈자리에는 7천5백여평의 공간부지를 남겼다.

◆장령동(掌令洞) 풍정 아랫말에서 동북쪽의 깊숙한 골짜기에 있던 마을로 지금은 민가 없는 빈 골자기로 이름하여 장지골 또는 장명골이라 일컫는다. 장령동이란 지명의 유래는 장령 벼슬한 사람이 처음으로 이곳에 들어와 살았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고려 충정왕 때의 사람으로 지평 최용생이란 분이 경상도 안렴사로 있을 때에 내시 주원지첩목아에게 무고를 당하여 억울하게 이곳으로 유배되어 산 데서 비롯된 것이다. 장령이란 품계는 고려 때의 간대 즉 사헌부의 정 4품의 관직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그 밑에는 지평, 그 위로는 집의 그리고 두 계단 뛰어서 대사헌이다. 그런데 고려사에 의하면 '(전략) 지평 최용생을 경상도 안렴사로 삼았다가......'로 기록돼 있음을 보게 되는데 이는 그의 유배지가 이곳 장령동인 것으로 감안하면, 암련사로서의 품계에 걸맞는 장령으로 승진되었거나 또는 유배지에서 죽은 후 지평에서 장령으로 증직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직명은 고려를 거쳐 조선 태조 때는 시사로 고쳤다가 태종 1년(1401) 관제개정 때에 장령으로 환원시켰다. 제도에 분대를 파견할 때는 장령을 겸직으로 수여하기도 하였다. 장지골에 사람이 살지 않은 것은 지금부터 수십 년 전의 일이다.

◆저수지 : 장지골은 하도 골이 깊어서 옛날부터 수량이 풍부하여 1945년 이전에 축조한 소류지가 있었는데 그후 1960년에 몽리면적 30ha의 저수지를 다시 축조하여 풍정마을의 상수원 및 젖줄이 되어 오고 있다.

◆조옹골 : 장지골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

◆풍정마을 보호수(保護樹) 풍정 아랫말 경로당 앞뜰에 아름드리 회화나무 두 그루와 그 사이에 키가 조금 작은 느티나무 한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얼마 전에는 수령 600년쯤 되는 포구나무가 한족 지간이 없는 상태로 기형을 이루고 생립해 오다가 마침내 수명을 다한 듯 고사하고 말았다. 봄에 잎이 무성하면 풍년이 들고, 동시에 피지 않으면 가뭄이 들고 우환이 많다는 전설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옛날부터 마을 사람들의 외경의 대상이자 마을의 상징으로 사람들의 아낌을 받아온 나무들이다. 현재 수령 300년 이상으로 추축되는 회화나무 두 그루는 언제 누가 심었는지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 마을에서 제일 연로하신 분의 말을 빌리면 일제 때에 지금의 괴목보다는 더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배를 모으기 위해 일인들이 베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무를 벤 후부터 마을에 언짢은 일이 자주 생겼다 한다. 해방 후 주민들이 그 그루터기에 불을 질러 없애고 바로 옆에다 심은 것이 지금의 느티나무이다. 회화나무는 콩과에 속하는 납엽 활엽 교목으로 대개의 마을에는 당목으로서 한두 그루는 서 있게 마련이다. 옛날부터 마을의 수호신이 깃들어 있는 나무라 하여 신성시되어 왔으며, 이 나무들을 통하여 동민의 두레의식과 화합을 도모해 오기도 하였다. 현재 이 세 그루의 수간 밑에는 직경 5m의 원단이 축조되어 시군나무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풍정숲 풍정리 아랫말 서남대로변의 남라등과 지금은 없어진 옥산간에 있었던 수림이다. 옛날에는 '동지서남에 유대림수'란 실기와 같이 그 당시에는 수해를 이루어 울창하기 비할 데 없는 큰 숲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1920년대 들어 사천∼고성간 국도(33호선)가 뚫리면서 숲은 두 동강났고 이로써 숲으로서의 모습을 잃게 되었다. 현재 성홍주유소 서쪽 언덕빼기에 있는 조그마한 숲이 일부이다.

◆합다리 : 풍정 아랫말 서쪽에 있는 조그마한 다리로 지금은 없어졌다.

◆합타리새미 : 합다리 밑에 있는 샘.


<자료출처:정동면지>

풍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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