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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9.21 01:54

소곡리(所谷里)-소곡/가곡/객방

◆소곡(所谷) : 소곡리의 소곡이란 지명도 면내의 침곡(針谷), 운곡(雲谷), 대곡(大谷), 감곡(甘谷), 고자곡(古自谷) 등과 마찬가지로 골(골짜기)을 나타내는 한자 '谷'자가 붙어서 된 이름이다. 그런데 소곡 이전에는 쇠(금)를 캐낸 까닭에 '회실', '쎄실' 또는 '금곡'이라 일컬었으니 지금도 흔히 그렇게 불리운다. '골'은 한자의 谷과 洞으로 대개 맞옮겨져 왔다는 것인데, 谷의 의미를 갖는 것은 본래의 <고을>의 준말이라 한다. 이를테면<∼洞>·<∼올>·<∼실>·<∼일>이 모두 谷에 대응한다는 것이며, 이중에 <∼올>은 <골>의 'ㄱ'이 약화하여 탈락한 형태이고, <일>은 <실>의 'ㅅ'이 약화 탈락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골'이 면내뿐 아니라 전국에서 많은 분포를 보이는데 반해 '실'은 주로 내륙 산간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는 데서 붙여진 지명이다. 그러므로 '골'과 '실'은 같은 의미를 갖는다 하겠으며, 침곡을 바느실로, 운곡을 구름(굼)실, 대곡을 한실, 감곡을 감실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그런데 쇠가 나는 까닭에 쇠실 또는 금곡이라던 것이 어떤 연유로 해서 오늘날의 소곡(所谷)으로 불리우게 되었던 것일까? 지명에는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강한 보수성과 구어성의 특성을 지니는 법인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지 않나 추정된다. 먼저 한자로 표현한 소(所)자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곳소임을 알 수 있다. '골'이 면내 뿐 아니라 전국에서 많은 분포를 보이는데 반해 '실'은 주로 내륙 산간지역에 분포되어 있다는 데서 붙여진 지명이다. 그러므로 '골과' '실'은 같은 의미를 갖는다 하겠으며, 침곡을 바느실로, 운곡을 구름(굼)실, 대곡을 한실, 감곡을 감실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그런데 쇠가 나는 까닭에 쇠실 또는 금곡 이라던 것이 어떤 연유로 해서 오늘날의 소곡으로 불리우게 된 것일까? 지명에는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강한 보수성과 구어성의 특성을 지니는 법인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지 않나 추정된다. 먼저 한자로 표현한 소자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곳소(處也)임을 알 수 있다. 장소를 나타내는 '곳소'는 생산적인 측면에서 무엇을 캐내는 곳, 또는 어떤 물건을 만들어 내는 곳이라 풀이된다. 이런 과정에서 소곡 부락은 옛날부터 쇠만 파낸 곳이 아니라 사기그릇을 굽어낸 도요(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있었음을 다음에서 알 수 있다. 그것은 부락 언저리에 약 300평 남짓 되는 곳(390번지)에 일부는 밭으로 되어 있고, 그 주위에는 분청사기의 조각들이 무수히 흩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소곡에는 대개 15~16세기경 사기그릇을 굽던 자기소가 설치돼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옛날에는 소(所)라고 칭하는 특수 지역이 있어서 생산하는 종류에 따라 각각 금소(金所), 동소(銅所), 지소(紙所), 와소(瓦所), 탄소(炭所), 자기소(瓷器所), 어량소(魚梁所) 등으로 구별되어 각기 그 물건을 만들게 하였다. 이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위와 같은 종류의 물건을 만들기 위하여 두었던 특수기관으로서 전국에 널리 분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으로 살폈듯이 소곡 부락에는 조선 초기부터 얼마동안 쇠를 캐낸 철장(철의 산출지에 설치한 제련장)이 있었던 까닭에 처음에는 쇠실 또는 금소(金所)이라 하였다가 그 후 사기그릇을 굽어 낸 자기소가 설치되므로 해서 소(所)자와 곡(谷)자를 따서 붙인 오늘날의 소곡(所谷)이 된 것이다.

◆쇠바위굼터와 철장(鐵場) : 소곡 부락을 올라가면 서나만에 '큰골'이 나타나는데 그 골짜기 산 중턱에 이르면 옛날부터 쇠(금)를 파던 광산이 있다. 소곡리산 105-1번지로서 흥무산의 산줄기이다. 이 산등에는 소위 '쇠바위굼터'라는 이름의 폐광지가 여러 곳 널려 있으며 그 중의 한 폐광에 내려가 보면 여러 갈래의 갱도가 이리저리나 있음을 보게 된다. 어느 시대부터 쇠를 캐내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 곳에서 철이 산출됨으로 해서 쇠실(쎄실) 또는 금곡이라 일컫는 지명이 생겨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구전에 따르면 이곳 폐광터는 채굴 수법으로 보아 5∼6세기경 가야시대부터 채광했을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이를 입증할 만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튼 고대부터 이곳에서 쇠를 파냈다는 사실은 향토의 전통을 엮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신월(新月)고분유적(古墳遺跡) : 이 마을이 들어앉은 동쪽으로는 이른바 큰 냇고랑(사천강의 상류)이 있으며, 이것은 서북으로 흐르며 사천바다로 들어간다. 서남쪽 지역은 모두 산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가운데 가장 높은 산이 흥무산이고 남쪽으로는 소곡리와 신촌리(고성군 상리면) 사이로 작은 내가 있으며 이곳으로부터의 물줄기가 신월마을 앞에서 큰 냇고랑으로 흘러든다. 이 마을에서의 유적 조사 작업은 홍수로 인하여 유구의 일부가 드러난 냇가 가까운 지점에서 발견되었는데, 1969년 8월 단국대학교 박물관의 조사팀이 12일간에 걸쳐 무덤유적 12기를 조사한데서 비롯되었다. 홍수를 입어 외부로 나타난 강쪽의 퇴적(堆積) 자른면에서 돌널식의 무덤방과 그 위쪽 부분에 깔려진 판판한 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12기중 7기는 이미 파괴되어 하부구조만 남아 있었는데 나머지 5기는 완전한 상태여서 원형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구조는 남방식 고인돌의 바탕인데 장방형의 석실 위에 넓은 돌널 1매 혹은 2∼3매를 얹은 다음 그 위로 3층단의 판석층을 쌓고 그 위에 또 하나의 넓은 돌널을 얹고 있었다. 대개 무덤방의 길이가 170cm, 너비가 90cm, 깊이는 40∼70cm로 이 무덤방을 중심으로 지름 4∼6m의 원을 그리면서 병풍처럼 높이 50cm 정도로 돌널을 연결시켜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각 무덤방에서는 붉은간토기와 민토기의 조각들이 무수히 나왔으며, 가락바퀴 및 살촉도 발견되었고 간혹 홍도편도 나왔다. 출토된 이들 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신월의 무덤유적은 청동기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무덤방의 완전한 5기 가운데 아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가장 규모가 작은 1기(70 ×25 ×30cm)를 운반하여 그 원형대로 복원하였는데, 현재 단국 대학교 박물관 제 2진열실 뒤뜰에 보존되고 있다.

◆신월마을 : 소곡 부락에 달린 자연 부락으로 이 마을 앞에는 큰 냇고랑(사천강)이 흐르고 마을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다리를 건너야 한다. 예전에 이 다리가 처음 가설되었으며 대는 새다리라 했는데 어느새 새다리가 새달로 전음되어 지명 또한 신월이라 불리운다. 다리가 놓인 곳에는 한자로 달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로서 상월리, 하월리, 내월리, 상월곡동, 하월곡동 따위의 리명이 그것이다. 이는 각각 '웃다리골', '아랫다리실', '안다리실'로 불리며 곡(谷)자가 붙은 두 리명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두 다리를 달로 표기한 사례들이다.


◆가곡(柯谷) : 가곡 부락은 아랫가곡과 웃가곡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랫가곡이 중심마을이다. 웃가곡은 본래 가슬리의 일부로서 옛날에 고성군 상리면의 관할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가곡으로 편입된 자연부락이다. 지금은 부락 앞에 나있는 냇고랑을 경계로 군계(사천과 고성군)가 확정돼 있지만 옛날에는 냇고랑의 변화가 심해 행정구역이 들쭉 날쭉이었다 한다. 따라서 사천의 가곡과 고성의 가슬은 당시 양 군에서 볼 때 각각 맨 가장자리에 위치하였음을 이로써 알 수 있다. 가장자리의 골짜기나 또는 그러한 골(마을)이란 뜻을 대개 '가실(가오실)'이나 '갓골'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가장자리'란 뜻의 '갓'은 '가사' '가자', '가재' 등으로도 전음 되어 전국에 무척 많은 관련 지명을 이루게 하였다. 예컨대 갓골은 '가실'로 불리기도 하여 이런 마을들은 대개 골짜기에 많이 분포돼 있다. 전국에서 어떤 고장에는 '가야식', '가오실', '가실' 이란 이름의 마을이 있는데 모두 가곡이라는 행정지명을 달고 있다. 가곡이란 리명(理名)은 다른 곳에서도 많이 볼 수 있으며, 그 곳들에는 각각 '가울', '가야골', '가리실', '가삿골', '갓골'이란 이름의 자연부락이 있기도 하다. 다른 한자인 가곡(柯谷), 가곡(嘉谷), 가동(佳谷) 등의 이명도 각각 '가실', '가오실', '가야골'이란 자연부락 이름에서 옮겨진 지명들로서 모두 '가장자리'라는 뜻을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가실리, 가슬리도 역시 이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잇다. 구전에 따르면 웃가곡의 지명을 가슬리라 한 것은, 옛날 숲속 나무 등걸에 노리시설을 마련하여 선비들이 거문고를 타면서 풍악을 즐겼다는데서 이름하였다 한다. 하지만 위에서 살폈듯이 가곡, 가슬은 모두 가장자리의 골짜기란 뜻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산제터(산제곡, 山祭谷) : 가곡부락도 면내 여타 부락과 마찬가지로 웃가곡 뒤 산골짜기에 산제(당산제라 하기도 함)를 모시던 곳이 있어 지금도 산제터라 일러온다. 마을 공동체의 제사인 동제는 우리민족 고유의 전승신앙이다. 따라서 가곡부락의 동제인 산제도 주로 마을의 무사태평과 행운을 기원하기 위하여 섣달 그믐날 밤 자정에 지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다. 경비는 가가호호 주민의 추렴으로 하거나 부락의 기금으로 추앙하여 제주(제관)는 생기복덕이 많은 사람 가운데서 뽑는 것은 다른 곳의 동제사와 같다. 제주로 뽑힌 사람은 그날부터 일체 궂은 일에나 궂은 일이 일어난 집에는 발걸음을 않는 것이다. 산제터란 옛날부터 위에서와 같이 마을의 안가태평(安家泰平)과 재복(財福)을 빌고 한 해의 풍요를 기원하는 동제 즉 당산제를 지내는 당산에 있는 곳이라 하여 일컬어온 지명이다. 곧 산제를 지내는 산제골이란 듯이다. 마을 노인들에 의하면 가곡마을 제사는 마을이 열린 후부터 면면이 이어져 일정 때를 거쳐 그 후에도 얼마동안 행사해 왔다고 한다. 수년 전까지도 산제터에 오르면 고목 밑에는 당시 사용했던 사기그릇(제기)이 한군데 보관돼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도 볼 수 없다.

◆객방(客坊) : 부락의 동북쪽에 떡시루처럼 생겼다 하여 시루붕(259m)이라 일컫는 이름의 아담한 산이 있으며, 봉대산과 함께 마을들(웃땀과 아랫땀)과 들판을 감싸안고 있다. 시루모양새의 시루에는 불을 지펴야 떡이 쪄지는 법인데, 이 아궁이 역할을 하는 곳이 산자락 어디엔가 있었을 성싶다. 잘 모르기는 해도 그곳이 바로 웃땀골 앞 들판의 구릉지대가 아닌가 한다. 이 구릉은 약 500평 남짓 야트막한 평지로 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옛날에 쇠를 다루었던 흔적의 철설(鐵屑:쇠의 부스러기, 쇠똥)이 많이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철설의 존재는 쇠를 파내어 정철(正鐵)을 제련하는 야외 용해노적(溶解爐跡)임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지어 볼 때, 쇠(금)는 옛날 소곡리의 쇠실에서만 파낸 것이 아니라 이곳 객방산에서도 많이 캐어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의 근거로는 웃땀골 동쪽 뒷산의 폐광지가 이를 말해 준다. 그리고 야외노적과 이들 폐광터는 옛날부터 객방에서도 쇠가 산출되었음을 이로써 알 수 있다. 소곡(쇠실)의 쇠바위굼터와 관련하여 조선초기 다시 전국의 각 고을마다 쇠(금)가 나는 곳에는 비로소 철장을 설치하고 백성을 모집하여 사철·석철 등을 제련하여 정철로 만들어 국용에 쓰게 하였다는 앞에서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잇다. 해서 위 용해노적은 조선 초기의 제련소이자 철장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곳 야철지는 외지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취락을 이룬 야방(대장장이가 일하는 일종의 공장)이었던 것이며, 외지에서 들어왔다 하여 손 객(客)자, 골 이름의 방(坊)자를 다서 객방(客坊)이라 한 것이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객방부락의 여러 골짜기 곧 도랑골, 보리골, 솔미골 등 여러 곳에는 옛날부터 명당 자리가 많기로 이름난 곳이다. 소위 풍수에서 말하는 사이 곧 땅이므로 사람들은 모름지기 좋은 물과 공기를 기대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명당자리를 개발해 이용하면 지덕을 누릴 수 있다는 잡술에서 나온 민속신앙이 아니었던가 싶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이곳이 사천에서 맨끝 가장자리에 위치한 산촌으로 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그 옛날 쇠가 나고 또 철장이 있었을 뿐 아니라 사천에서 고성을 거쳐 통영(통제부)에 이르는 역로상에 위치하여 지척에는 가곡원(可谷院)이란 원우(院宇)가 있었던 까닭에 매우 붐비고 북적거렸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구판장 : 1977년에는 전 주민이 일치단결 하여 새마을 운동을 성실히 수행해 그 노력과 실적을 높이 평가받아 새마을 우수마을로 선정되어 대통령의 특별하사금 300만원을 받아 건평 50평(블록조, 슬레트 지붕)의 공동창고를 건립하고 동민들의 생활 일용품 등의 구매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었다.

◆노인회관 : 1994년에 정부 지원금과 동 자금 총 1,500만원을 들여 지었는데 건평은 20평(블록조, 슬라브 지붕)이다.

◆마을회관 : 동리일을 집행하는 동회관은 옛날에는 동사(洞舍)라는 이름의 집이 한 채 있었으나 낡아서 허물어 버리고 1970년에 새마을사업 등 동 자금으로 건평 20평(블록조, 슬라브 지붕)규모로 건립하였다.

◆소류지 : 부락의 북쪽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간 들녘의 막다른 골짜기에 있으며 6·25전쟁 와중에서도 농사는 지어야 하겠기에 1952년 5월에 기공식을 시작으로 4∼5년에 걸친 연차공사로 완공하여 아래에 있는 7ha의 천수답을 수리안전답으로 전환하였다. 이어서 1959년에는 마을 앞을 흐르는 큰 냇고랑 새보(新洑)를 설치하여 관개용수를 들판으로 끌어들였다.

◆웃땀골못 : 1978년 3월에 착공하여 그해 10월에 완공함으로로써 역시 아래에 있는 5ha의 논들의 젖줄 구실을 해줄 뿐 아니라 우기에는 홍수를 조절해 주는 역할까지 해 주고 있다.

◆헬콥터장 : 1978년에 설치된 봉대산의 헬리콥터 승강장을 말한다.


<자료출처:정동면지>

소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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