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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09.21 01:54

예수리(禮樹里)-예수/반룡/염광

◆예수(禮樹) : 옛적부터 예를 숭상하는 마을이라 하여 예촌(禮村) 또는 예수정(禮樹停)이라 한데서 예(禮)자와 수(樹)자를 그대로 따서 붙인 이름이다.

◆서짓골 : 예수의 동쪽 웃땀에서 서낭당산으로 오르는 조그마한 골짜기. 옛적에 골안에 글방인 서재서당이 있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사천읍지》(1832년 간행) 산천조에 의하면, "이구산 밑에 성인동과 성재동이 있으며 동중에 단이 있고 동외에는 궐리, 예촌, 예수정 그리고 강당촌이 있다."라고 씌여 있다. 위 글에서 예촌, 예수정, 강당촌 등은 동외에 있다고 하였으니 곧 서낭당산 밑에 있었음을 뜻한다. 강당촌이란 강의나 의식 따위를 하는 큰마루방이 있는 마을의 뜻인데 즉 서짓골을 지칭한다. 서재란 칙을 갖추어두고 글을 읽고 쓰며 공부하는 방 또는 서당(글방)을 말한다. 서당은 이 나라 방방곡곡이 다 그러했듯이 근대적인 교육기관인 학교교육이 있기 이전에는 각 마을마다 촌락 공동체의 한문을 가르치는 글방이 있었다. 글방에서는 입문서인 천자문을 시작으로 동몽선습, 명신보감, 통감 등으로 차차 그 정도를 높여 수학케 했는데 예수리의 이 서당이 언제 없어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예수숲(오인숲) : 사천교에서 반룡마을과 예수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의 강변길을 따라 한참 위로 올라가면 오른편으로 서낭당산과 바느실로 향하는 산길이 나 있고, 그 위쪽 들가운데 아담한 숲이 있으니 주민들은 흔히 오인숲이라 일컫는다. 느티나무, 팽나무, 냇버들 등 주로 낙엽 교목으로 이룩된 이 숲은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비바람에 시달리다 못해 많은 나무들이 고사되거나 또는 사나운 태풍에 뿌리 채 뽑혀서 넘어지고 게다가 농경지로 침식당하여 지금은 겨우 300평 남직한 땅위에 20여 그루의 노거수가 남아 있지만, 옛날에는 꽤 큰 숲으로서 풍치가 매우 아름다워 원근에서는 이름난 명소로 알려져 왔다. 수령 약 300여 년으로 추측되는 거목들 밑동에는 커다란 공동이 생겨나 하루라도 빨리 수술을 받아야 할 나무들이 많다. 그런데 이 숲이 언제부터 조성되었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아는 이가 없다. 예수마을의 지세가 공결하기 때문에 식수비보로서 임목을 많이 심어 그 기를 보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숲을 조성하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옛날에는 마을이 황량한 들판처럼 외부에 완전히 개방되어 있으면 무엇인가 썰렁하고 부족한 느낌을 받기 때문에 이런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선 인위적이라도 숲, 담, 울타리 등을 조성하여 마을을 다소 폐쇄된 공간으로 만들려는 습속(習俗)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동수(洞藪)라 일컫는 예수숲을 조성하여 앞서 말한 풍수상의 허결(虛缺)함을 보허(補虛)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예수숲을 오늘날 '오인(五印)숲'이라 일컫게된 까닭은 다음의 일화에서 비롯되었다. 즉 구한말 때인 1901년경 전후하여 사천군수 유슌백이 당시 일제의 침략 야욕이 우리나라에 뻗치게 되자 기울어 가는 국운을 근심한 나머지 그의 주선으로 인근 고을인 진주·곤양·단성·고성·등 4개 군의 관장을 초빙하여 각기 지니고 온 인신을 이 숲 속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수령으로서의 당면과제를 서로 진지하게 의논한 곳이라 하여 후일 오인숲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예수교(禮樹橋) : 고성 무량산에서 원출한 연장 26km에 달하는 사천강에는 길고 짧은 10여개의 교량이 놓여 있는데 그 중에 정동면에서만 6개나 되며 이중에 하나가 예수교이다. 예수리와 고읍리를 잇는 길이 72m에 교폭 5m, 교량의 높이 7m의 규모로 1972년 말에 준공된 이 다리는 여느 다리와는 달리 예수마을 주민들의 오랜 숙원사업의 하나로서 특히 부녀회원들의 피땀어린 노력의 한 결과라는데 그 의의가 있다.

◆서낭당산 : 예수마을과 바느실 뒷산. 동쪽에 우뚝 솟아 있는 이구산에서 뻗어 내린 해발 209m의 완만한 산등성이로 형성된 산이다. 봉우리에 올라 뒤를 바라보면 북으로 얼마 안 되는 지점에 사천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서쪽으로는 사천비행장과 사천만이 역시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조망을 이루며 동쪽과 남쪽은 우람한 이구산과 구룡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천의 주산이면서 진산으로 신성시해 온 북쪽의 부봉산과 마주한 이 산에는 옛날부터 사천 고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 있다고 믿어온 산으로 예로부터 정통적 연례행사로서 '사천서낭지신'을 모시는 서낭당의 단묘가 있던 곳이다.

◆침곡소류지(針谷小溜池) : 예수마을 뒷산 넘어 동쪽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 바늘실의 막다른 자시고개 산기슭에 있는 저수지. 저수지 바로 위 산비탈에는 사천관광농원이 자리하고 또 북쪽에는 서낭당산성으로 오르는 산도가 나 있다. 소류지란 작은 저수지인 보(洑)를 말하는 것으로 관개용의 물을 하천이나 계곡물을 끌어 들여 담아 놓은 못을 가리킨다. 곧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골안 맨 윗쪽에 둑을 쌓고 흐르는 시냇물을 막아두는 봇물이다. 1963년경에 총 공사비 55만원으로 만들어진 이 소류지는 둘레가 약 250m정도 되는 소담한 저수지로 아래에 있는 바느실, 고래실, 구름실, 와앳골 등 많은 천수답의 젖줄 구실을 해주고 있다.

◆사천관광농원 : 사천읍에서 남으로 3km 지점에 있는 산골의 농원. 서낭당산으로 들어가는 예수리 산 61-1번지에 위치하고 선황사가 마주 보이는 아늑하고 한적한 도시 근교의 관광농원이다. 사천교를 건너서 곧바로 왼손편의 잘 포장된 예수부락 진입로를 거슬러 올라가면 오인숲 못미처 다시 오른편의 길을 따라 깊숙이 들어가다보면 바느실과 서낭당산으로 오르는 입구가 나타나는데, 그 맞은편 산비탈에 자리하고 있다.


◆반룡(盤龍) : 땅이름은 문자 그대로 풍수상의 지세가 마치 소반 위의 용이 사리고 있는 형상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이 부락 본래는 동서 두 곳으로 나누어져 야트막한 산자락 밑에 있는 동쪽 마을을 반룡동이라 하였고, 서쪽 골 안인 진삼국도변 좌측에 있는 마을을 반곡동이라 불렀는데 1914년 이후부터 반룡으로 일원화되어 반곡이란 이름은 사라졌다. 그런데 반룡과 반곡이란 두 지면은 오랜 옛날부터 전래해 온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는 구름실(운골, 굼실, 운곡), 기왓골(와앳골, 왯골, 와곡) 따위로 불리워졌다. 일테면 반룡의 전신은 구름실이 되며, 기왓골의 후신은 반곡인셈이다. 오늘날에도 흔히 반룡부락의 두 지역을 구분해 일컬을 때 굼실이니 또는 와앳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기왓골(와왯골, 왯골) : 사천교에서 남쪽으로 언덕길 왼편 구릉 너머에 있는 마을로서 오랜 옛날부터 골 안에 기와를 굽던 곳이어서 기와굴(가마터)과 기와집이 많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굴모티 전답 : 가마터가 있던 주변에는 기와조각들이 많이 발견되는데 그 주위의 논밭을 굴모티(가마굴이 있던 모퉁이라는 뜻) 전답이라 한다.

◆구름실(굼실) : 기왓골 맞은편 구릉 밑에 사천강을 굽어보고 있는 마을로서 본래는 지금의 염광마을을 포함하는 동쪽 골 안 일대를 망라하여 일컬었다. 안개가 끼는 날이면 짙은 안개나 연기가 골 안을 가득 채우고 몽실몽실하게 솟은 여러 산자락을 휘감는다. 그래서 운곡(구름실)이라 했다던가.


◆염광(鹽光) : 마을이 형성되기 이전에는 산비탈외진 곳에 한센씨병 환자 한 집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천주교 어느 교회에서 주선한 나병환자 몇 사람이 이곳에 들어와 살았으나 생활이 어렵게 되자 그만 다른 곳으로 흩어져 갔다고 한다. 그 뒤 1960년대 후반 경, 부산광역시 남구 용호동에 주소를 둔 대한기독교의 제일교회가 이곳의 임야를 대량으로 구입하여 교회를 짓고 한센씨병 환자들의 정착촌을 만든 것이 오늘의 염광마을이다. 이 마을은 본래 구름실의 지역으로 고래실이라고도 하는데 고개를 넘으면 진입로인 진삼국도가 나타난다. 염광이란 성경에서 말하는 소금과 빛이 되라는 뜻이 담겨 있다.

◆고분유적(古墳遺跡) : 바늘실의 서쪽 염광마을에 드리워져 있는 예수리 산 64번지에는 A.D 5~6세기경으로 추정되는 가야시대의 고분유적이 발굴된 바 있다. 이 무덤유적은 젖봉모양새를 한 완만한 봉우리 산비탈에 농경지를 개간하면서 처음으로 지상에 노출된 것으로 1977년 12월 동아대학교 학술조사반에 의해 6일간에 걸쳐 긴급 발굴·조사한 곳이다. 대학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발굴한 무덤은 7기로서 이중에 독무덤 1기가 포함돼 있다. 무덤의 유구는 가야시대에 있어 권위를 상징하는 왕이나 수장급의 고분 유구와는 달리 대체로 단조로운 민묘로써 경주나 창녕지방의 민묘류처럼 분구가 있었던 흔적이 없을 뿐더러 축조방식도 수혈식의 돌널무덤 같은 구조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보고서는, 얇은 돌널을 서로 맞춰 짠 돌널무덤의 형실을 취했는데, 환원소성의 토기와 철기 및 황금 사용시기까지 석관묘제의 유풍(遺風)을 본떤 무덤이라 결론지었다.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은 모두 104점인데 토기류와 치레걸이(장신구) 등 껴묻거리(부장품)가 주종을 이루었다. 이중에 토기류는 치레걸이에 비해 대체로 적은 편인데 그 종류로는 목항아리 4점, 굽다리접시 9점, 손잡이 접시 2점, 뚜껑 5점, 토제가락바퀴 1점 등이 나왔다. 굽다리접시는 투창하나가 세로로 길게 관통되어 있어서 전형적 가야토기의 양상을 띄고 있다.

<자료출처:정동면지>

예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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