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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11.28 01:34

용산리(龍山里)

◆본래 곤양군 초량면의 지역으로서 산이 용처럼 생겼다 하여 용산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산리라 하여 사천군 곤명면에 편입되었다. 면소재지에서 3km지점이고 하동 북천 이맹산(理盲山)과 마주 보고 경계를 이루어 사방이 높은 지대이므로 기온이 가장 낮은 곳이다. 둘러쌓인 능선이 구리(蛇)나 용처럼 형국되어 있어 동명(洞名)을 “구리실”라 불리어 오다가 100년전 용(龍)의 산형이 옳다 하여 용산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곤명의 가장 오지로서 산골물이 차가워 농사 기후에는 알맞지 않다. 높은 산과 계곡이 많은 탓으로 유서 깊은 다솔사(多率寺)와 서봉사지(栖鳳寺址)가 있고 봉암사(鳳岩寺) 북암(北菴)등 암자도 여러 곳이 있다. 뒤에는 서봉사(栖鳳寺)자리인 봉암산(鳳岩山)이 있고 남쪽으로 다솔사가 있는 봉명산(鳳鳴山)이 사승(寺僧) 싸움으로 얽힌 전설이 지금도 남아있다. 서봉사가 있던 봉암산(鳳岩山) 아래의 골짜기가 “옹기점골”이나 사찰용(寺刹用) 기와와 옹기를 구웠고 곤남군 때 공부한 자기(磁器)도 구웠다 한다. 또한 사찰의 역사와 흥망(興亡)이 타지역에서 볼 수 없는 곳이 용산이다. 1943년 축조된 용산못은 신산(新山) 조장(助長) 추동(推洞) 오사(俉沙)와 곤양 일부의 전 농지를 관개하고도 남을 정도의 수량이 좋은 저수지이다.

◆다솔사 : 용산 서남쪽에 있는 절. 신라 지증왕 4년(503)에 인도의 중 연기조사가 창건하여 영악사라 칭하였는데, 성덕왕 5년에 다솔사라 고치고, 문무왕 16년에 연봉사라 개칭하였다. 다시 다솔사로 개칭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음. <다솔사>

◆물넘기 : 용산 서북쪽에 있는 고개로 밑에 마을이 있다.

◆방장산 : 다솔사가 있는 산. 봉명산.

◆봉명산(鳳鳴山) : 일명 방장산(方丈山) 또는 주산(主山)이라고도 한다. 소재지의 법정리동(法定里洞)은 용산리(이지만 행정리동은 신산리(薪山里)에 딸려 있다. 방장산(方丈山)은 지리산의 이명(異名)이니 지리산의 영맥(靈脈)이 남으로 뻗어 다솔사의 대지가 이룩된 곳이라 하여 지리산의 일명을 따서 칭함이라 하며 주산은 대찰의 영기를 모은 뜻에서 나온 말이라 한다. 봉명산(鳳鳴山)은 서봉사의 봉암산과 마주보며 쌍봉을 이루고 있음으로 풍수학적인 상관에서 지은 산 이름이라 본다. 높이가 300여m 이며 다솔사의 후면을 감싸 주어 산형이 매우 수려하다. 봉암산 이맹산과 연봉을 이루고 있고 또 산 뒤편에 고려 때 축조된 석굴암이 현존하고 있어 학자와 등산객들이 이 일대를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한다. 산정에 올라서면 곤양 앞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고 작은 섬, 큰 섬에 배들이 오고 가는 고동소리 그 정경은 신선한 산바람과 함께 가슴이 스스로 활짝 펴지는 상쾌한 기분은 어느 곳에서도 맛 볼 수 없는 명소라 할 수 있다. 일제 침략시 경쟁한 독립투사인 한용운 김법린 김법부 최범술 김동리 등의 인사가 산록에서 은거하다가 울분의 시국을 논할 적에는 이 산정을 택했다 하며 때로는 망국의 한을 풀길이 없어 서로 부등켜 안고 통곡을 이 산 속에서 하였다 한다. 신라 때 인도 고승(高僧)이 산 밑 토굴에서 수도한 연유로 다솔사가 건립되었다하니 다솔사를 중심으로 하여 서봉사(栖鳳寺) 옛터와 이에 따른 일화, 그리고 서봉암(栖鳳菴) 봉일암 석굴암 옹기골 봉암산에 내려오는 전설을 더듬어 보면서 무언가 유허를 찾아 자료를 남길만한 곳이다.

◆봉암바구 : 서봉사 위편에 있는 바위. 두 개의 바위가 얹혀 있는데, 봉의 알처럼 생겼다 함.

◆봉암사 : 용산리에 있는 봉암산에 있는 절.

◆봉암산(鳳岩山) : 용산리의 북쪽에 위치하며 산정에 있어 바위가 봉의 벼슬과 같다하여 봉암산이다. 남쪽으로는 필봉 봉명산이 연봉으로 이루어져 있고 동남쪽으로는 멀리 와룡산이 굽이치며 병풍처럼 둘러쳐 그 앞쪽에 사천만 바다가 호수처럼 곱게 들어와 있으며 서쪽으로는 신라공주와 교룡(蛟龍)에 얽힌 전설이 있는 이맹산이 있고 그 산맥으로 내려온 백담산 밑에 석굴암이 자리 잡고 있다. 봉암산 밑에는 번영을 누리었던 서봉사 사지가 있다. 봉암산의 봉바위에 오르면 시야가 펼쳐져 진세의 답답한 심정이 한꺼번에 확 풀리는 느낌을 준다. 눈 아래 넓은 대지와 산골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숲 속의 산새소리 그리고 가늘게 들리는 시냇물 소리는 자연의 심취경에 빠져 어떤 악인이라도 잡념이 없어지고 인간 본래의 천심으로 돌아간다. 밤이면 삼천포와 노량진 사이에 반짝이는 어화와 와룡산 밑 진삼도로를 길을 질주하는 자동차 불꽃 행렬이 동화의 꿈속 나라를 연상케 한다. 전설에 따르면 봉암산 정상에 있는 봉바위 정기는 서봉사에는 고명한 학승이 많이 배출되고 다솔사에는 장군바위 정기 때문에 무승이 많이 나와서 두 절 사이에는 자주 마찰이 생겼다 한다. 그때 성질 급한 무승들이 몰려와 칼로 봉바위를 치니 두동강이 나며 봉은 하늘로 날아가고 반으로 갈라진 바위는 지금도 그대로 정상에 남아 있다. 변을 당한 서봉사 학승들이 다솔사로 몰려가서 장군바위 목을 붓대로 쳐서 부러뜨렸다는 그 장군바위는 다솔사 입구 길 섶에 목이 부러진 채로 전설을 입증하는 듯 지금도 푸른 이끼를 입고 묵묵히 서 있다. 산 중턱에 있는 서봉암은 백년화보살이 지은 암자로 경치가 수려하여 수도하는 학승과 공부하는 학생이 항상 얼어 지지 않으며 휴일 등산코스로도 각광받고 있다. 고적과 명찰의 사적을 더듬으며 향긋한 고삭의 난향을 만끽하고 골짝 가재도 잡으면서 자연풍경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봉사지(栖鳳寺址)의 묘 : 다솔사의 암자인 서봉암(捿鳳菴)에서 오른편의 깊숙한 터에 고려 때에 창건되었다는 서봉사(栖鳳寺)의 절터가 있다. 지금은 밭으로 일구어져 있고 밭 가운데 널따란 주춧돌이 그대로 놓여져 있으며 부서진 해태의 석상과 밭두렁에 파묻힌 돌기둥 그리고 식량을 도정(搗精)하던 호박 물레방아 등 여섯 개가 현존하고 있음은 당시 절의 규모가 웅장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옛 대웅전 자리라고 짐작 되는 곳에 무덤이 그대로 밭 가운데 있으니 이를 세칭 권진사묘라 한다. 이묘에 대한 설화가 전하고 다솔사 총무였던 박성태에 의해 구전됨으로 여기에 적기로 한다. 연대는 미상이나 광해조이후로 본다. 그때 부임한 곤양군수 권모(?某)는 선친 권진사의 묘지를 명당자리에 쓰면 출세하여 영달할 것이라 생각하여 명망있는 지사(地師)로 하여금 명지(名地)를 찾으려고 애써 오던 중 서봉사(栖鳳寺) 절터가 대지임을 알게 되었다. 권 군수는 지방 관장(官匠)에게 부여된 삼권(三權)의 막강한 힘과 당시의 배불(排佛)정책의 여세를 몰아 승려의 음모였다고 구실로 이 절을 불태우게 하였다 한다. 권력과 영달의 눈이 어두운 권군수의 폭거로 이리하여 절은 폐허가 되고 폐허된 절터 위에 권 군수는 그의 아비 권 진사의 묘를 안장 했다 한다. 이장 후 오래가지 않아 권 군수는 부귀영화의 꿈은 고사하고 인망가패(人亡家敗)하였고 후손마저 절손되었는지 내내 성묘하는 자 없었다 한다. 70여년전 어느 봄날 이 초라한 분묘 앞에는 80세 가량의 백발 노파가 슬픔에 잠겨 성묘를 하더란다. 이 소문을 듣고 모여든 이웃 노인에게 혈육이라곤 하나뿐이어서 죽기 전에 성묘를 하려고 찾아오게 되었다고 하며 외손(外孫)되는 집안은 곤명에 살았다는 설이 있기도 한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준 교훈은 자신이 분수를 넘어 천리(天理)를 거역하고 무한의 탐욕은 종말의 비극이 몰아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고 있다.

◆서봉산 : 용산 서북쪽에 있는 산. 이곳에 서봉사가 있었다.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 : 곤명면 다솔사 입구의 하늘을 찌를 듯한 송림 기슭에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에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 각자(刻字)되어 있으니 이 연유를 찾아보기로 한다. 1880년대 이조 고종(高宗)중엽 때의 일이다. 다솔사는 장군대좌설(將軍大座說)로 예부터 명당 대지였음을 이미 알고 있는 경상감사가 대좌국의 명다자리에 선영을 안장(安葬)코자 결행 일정을 잡았다. 다솔사 측으로 본다면 사찰의 명운이 걸린 일이었으나 감사(監司)의 권세에 눌리어 어떤 방안도 못 내고 멀지 않아 절은 폐허될 것으로 예견하며 한탄만 되풀이 하였다. 이때에 절에서 참선 수학 중이던 호암 정암 두 스님이 결연한 마음을 갖고 전사승(全寺僧)과 신도의 연서(連書) 탄원서를 가지고 자청하여 상소할 것을 책임지고 잔류 승려에게는 돌아 올 때까지 어떠한 난관이 있어도 입장(入葬)을 방어하도록 당부하고 상경 길을 떠났다. 신도수가 다솔사 보다 많았음으로 이들에게 호소하여 동정을 받아 함께 가세하게 이르렀다. 두 스님이 상경한 호암, 정암 두 스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걷고 걸어 목적지 서울에 닿아 돈화문에 이르니 저 멀리서 쉬잇 소리를 외치면서 어느 대관(大官)이 행차를 하는데 나졸에게 물으니 청국(淸國)으로 가는 사신(使臣)인 동지사(冬至使)는 의아하여 무슨 사연인가를 물으니 두 스님은 방성호곡(放聲號哭)을 하면서 다솔사 구원의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동지사가 탄원문을 받아 보니 글귀가 한자 한자가 피 눈물로 맺어진 구불이 읍소(泣訴)인지라 다 읽자 어느 듯 감동이 되어 그 자리에서 지필묵(紙筆墨)을 내어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 써 주며 말하기를 「감상에게는 이 길로 아뢸 것이니 입장을 못 하도록 서둘러 내려가라」지시하였다. 두 스님은 너무나 뜻밖의 하회문(下回文)을 받고 백배(百拜) 둔수 하면서 하향길을 재촉하였다. 도중 문경새재에서 우연히도 곤양으로 부임하는 신관 사또를 만나게 되어 비장(悲壯)을 통하여 이런 일 있음을 고하니 사또 또한 부임 인사차 감사를 뵈러 가는 길이라 쾌히 아뢸 것을 다짐하였다. 보고를 마친 다음 이 사실을 말하게 되었다. 듣고 있던 감사는 대노하면서 임지에 닿기도 전에 직권을 남용하여 상사를 우롱함은 용서 할 수 없다 하며 호통을 쳤다 한다. 이때 곤양군수는 옷소매에서 글귀 적힌 종이 한 장을 내면서 “어명(御命)이요”라고 소리치니 감사는 혼비백산되어 대청 아래 꿇어 엎드리니 군수는 소리도 드높혀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하고 외쳤다 한다. 이리하여 감사의 헛된 입장의 욕망을 무산시켜 좌정되었으니 이 두 스님과 명관(名官)의 도움으로 다솔사는 구제되었고 사승(使僧) 및 신도 모두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불력이 얼마나 큰가를 새삼 깨달으며 신심을 더욱 돈독히 하였다 한다. 후일 호암 정암 두 스님은 불도에 정진하여 이름 있는 대승이 되었다 한다. 이로부터 입구 바위에는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라 새겼으니 누구도 헛된 야욕을 가지는 자 없었다 한다. 어금혈봉표(御禁穴封表)는 고종 22년(1885)에 각자(刻字) 되었음으로 이후 다솔사 역내(域內)에는 분묘(墳墓)가 어명으로 금지 되었었다.

◆용구점골 : 용산 북쪽에 있는 골짜기에 마을이 있으며 옛날 옹기점이 있었다 함.

◆용봉산 : 용산 북쪽에 있는 산.

◆절골 : 용산 서쪽에 있는 마을.



<자료출처:사천지명지>

용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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